[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4 -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1편 http://rainote.tistory.com/34

2편 http://rainote.tistory.com/37

3편 http://rainote.tistory.com/49


*센티넬버스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장그래가 센티넬(이능력이 있고 정신이 불안정)이고, 한석율이 가이드(센티넬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라는 것 정도만 알고 보시면 크게 무리 없이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GM-Nell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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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십시오.」

무뚝뚝한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석율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세 번은 문자를 보내야 답이 오는 것이, 말이 없기는 현실에서나 전화기 너머에서나 다를 바가 없었다.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모티콘을 전송하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카페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아침 먹으란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꽤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편이었고 어린 시절 그는 매일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벼 가며 거친 밥에 된장국을 말아 꼭꼭 씹어 넘겨야 했다. 장그래도 비슷한 사람이려니 넘겨짚은 것이 정곡이었던 모양이었다. 몇 통 없는 답장만으로도 그는 쉬이 상대방의 표정을 떠올려 냈다. 놀라서 둥그레졌을 눈을 상상하니 또 웃음이 났다.

"밥 드시면서 실실 웃으시는 거, 되게 모자라 보입니다, 한석율씨."
"어, 백기씨 아냐. 오랜만이네. 프로젝트 끝났나 봐요?"
"……내가 말했었나요?"
"아뇨, 당연 내 전매특허 독심술이지."

내, 참, 못 말려. 윙크와 함께 건넨 멘트에, 장백기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늘 먹던 걸로? 이것만 다 먹고 준비해 드릴게. 백기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석율은 잽싸게 남은 음식을 해치우고는, 땡땡이 무늬 셔츠의 카라 깃을 한번 정돈하고, 목을 좌우로 꺾어 돌린 후에 기지개를 켰다. 휘핑크림을 추가로 얹은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만드는 동안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간 한석율씨 같은 사람이 카페 같은 걸 할 생각을 한 게 신기해요, 심심하지 않아요? 장백기는 안경 너머의 순한 눈을 접어 웃었다. 아, 사실 그래서 인테리어를 좀 신 나는 걸로 할까 하다가, 누나들한테 완전 까여가지고. 그리고 카페 하면 사람 많이 만나서 의외로 괜찮아요. 그는 실실 웃으며 대답하고는 카운터로 돌아가 휴대폰을 집었다. 메시지 창은 여전히 그래가 보낸 맛있게 드십시오, 와 자신의 이모티콘이 마지막이었다. 잠깐 허공에 떠 있던 손가락들이 금방 바삐 움직였다.

「뭐 해요? 가게 바쁜가?」
「바쁘면 답장 안 해도 돼요.」
「안 바쁩니다.」

또박또박, 어차피 폰트도 다 정해진 휴대폰에서 그래의 메시지라고 해서 더 선명하고 덜 선명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 답변이 유독 반듯하게 보이는 것은 잘 닦아 갈무리한 것 같은 그 목소리와 태도 때문일 것이라고 석율은 생각했다. 장그래는 특이했다. 한석율이 아는 한 가장 독특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꽤 넓은 인맥의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였음에도 장그래는 특별했다. 그는 깊이 모를 호수 같아서, 돌멩이 하나쯤 던져넣어도 표 하나 나지 않을 것 같다가도 어떤 때에는 스치는 낙엽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손을 담그면 청량한 온도가 손목을 시원하게 스칠 것만 같았다. 장그래, 이름도 그래여서는, 입 안에 넣고 굴릴 때마다그 어감이 박하사탕처럼 목청을 싸아하게 식혔다. 그것이 뻔뻔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석율로서도 사뭇 근지러웠다.

「안 바쁘면 지금 놀러올래요?」
「죄송합니다.」
「농담.」

간질거리는 손가락 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장그래의 미간을 짚었던 손가락이었다. 그 곳의 온도만이 한 톤 낮은 색이었다. 서늘함이 고인 이마를 찌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들여다보기 어렵던 그 말간 얼굴. 메시지 창의 숫자가 사라진 채로, 수 분 간 응답은 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고선 붉어졌을 목덜미를 생각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자 와르르 쏟아졌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책을 읽던 백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아, 미안해요. 톡 좀 하느라고. 사과를 건네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아, 의자 주문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내가 바빠서 못 챙겨드리거든.」
「평일 낮 아무때나 대환영!」
「혹시 장그래씬 평일 낮에 바쁜가?」
「아닙니다.」

"웬일로 문자를 그렇게 오래 해?"

아, 나쁜 일 하다 들킨 아이 모양으로 후다닥 주머니 안으로 휴대폰을 숨겼다. 동네 서점 주인인 오상식 사장이었다. 만성 불면증을 겪는 사내는 늘 머리가 까치집이었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요즘 같이 학습지 아니면 책이라곤 팔리지도 않는 시대에 고전 전집이니 철학서 같은 것에 서점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어 그의 가게 매상보다도 아내가 놀이방을 열어 버는 수입이 많다고 했다. 암만 그래도 말야, 세상이 팍팍해도, 어, 사람이 말야 똘스또이니 칸트, 이런 거는 읽고 살아야지. 그는 서점 운영 이야기만 나오면 늘 철 지난 고집을 피워댔다. 상식은 그래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흘깃 쳐다보았다. 인기척도 모르고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던 것이 쑥쓰러워 또 체열이 귓가로 쏠렸다. 그, 전에 왔던 손님이, 문자를 보내서, 요. 더듬더듬 대답하다가 그것이 제가 듣기에도 변명하는 말 같아 마른 숨을 집어삼켰다. 누가 뭐래? 오 사장은 입술을 내밀고 뚱한 얼굴로 쿠키를 집어 씹었다. 마누라 바가지 피해서 온 거야, 임마. 그는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카운터 위로 책을 툭 집어던졌다. 그래가 일전 예약했던 소설책이었다. 귀찮게 말야, 요새 이런 건 인터넷 서점이 더 싼 거 모르냐? 투덜거리는 것과 다르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오사장님 매상 올려드려야죠. 빙글빙글 웃으며 화답하곤 책을 받아 챙겼다.

"별, 시답잖은……. 요즘도 별 일 없냐?"
"예, 뭐 그렇지요."
"영감 같은 건 여전하군……. 그 컵은 뭐야, 못 보던 건데. 니 취향 아니잖아."
"아, 선물 받았습니다. 손님한테."

상식은 미간을 찡그렸다. 별 일이 없다더니 완전 별일이잖아. 장그래는 뭘 답삭답삭 받거나, 누구랑 문자질을 하거나, 그런 놈이 아니었다. 전화도 잘 받지 않아서 뭐든 연락을 하려면 직접 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됐다. 능력 때문에 사람 하나 사귀는 데 남들보다 곱절은 고생하는 녀석이다. 특히 남의 물건에 닿는 일을 병적으로 꺼렸다. 수 일씩 잠을 못 자고 악몽울 꾼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선, 선물 씩이나 받았지. 그것도 컵만 봐도 한 법석 하는 놈일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 말이지. 살아있는 철벽 같은 장그래한테 선물을 안겨준 것을 보면 절대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머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그래도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시선을 거두었다. 다 큰 남의 집 아들놈이 누굴 만나 뭘 하고 다니든 뭔 상관인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떼같은 세 아들자식 앞날이나 걱정하라는 마누라 바가지가 귀에 얼얼했다. 그럼 가 본다. 손을 내젓는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십시오, 깍듯이 인사했다. 짤랑거리는 종소리를 남기고 오 사장은 골동품점을 나섰다. 그래는 차를 새로 끓여냈다. 음악을 틀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켰다가, 도착해 있는 메시지 알람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럼 이번 주 수요일 11시 콜?」
「3초 안에 답 없으면 수락 한 걸로 알겠습니다~」
「3!」
「2!」
「1!」
「땡! 그럼 11시에 차 가지고 마중 갈 테니 그 때 봐요 :D」
"……."

잠깐 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와르르 도착한 메시지들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답장을, 뭐라고 해야 좋은 거지. 아니, 내가 답장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건 맞나? 메시지가 도착한지는 20분이나 지나 있어 더 애매했다. 한참을 화면도 못 넘긴 채로 아직도 조금 얼얼한 이마를 긁었다. 문득 기껏 새로 내려온 차가 식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과 어디까지 친해져도 좋은 거지. 아니,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정의되지 않은 관계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어지러이 떠다녔다. 머릿속이 마치 물건들이 모두 어질러진 서랍장 같았다. 미지근한 차에서는 떫은 맛이 났다. 한숨을 내쉬고 물을 새로 끓였다. 목이 타서 자꾸 마른침을 삼켰다. 거리 조절. 늘 그것이 어려웠다. 그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가깝거나 반대로 너무 멀리 있었다. 그의 서투름은 호의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이렇게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밀쳐내거나 물러서고 만다. 지금 석율과의 거리감이, 그 손가락과 제 이마의 온도차가, 그에겐 몹시 애매했다. 애매한 거리를 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썼다가 지우고, 나중에, 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확신도 없이 덥석 달려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상대방의 상처받은 목소리는 언제나 그래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고민하고 있죠?」
……귀신인가.
「생각해 보고 천천히 답변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전날까진 답 줘요~ 답 없으면 또 끌고 나와 버릴라니까는.」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묵직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거의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짧은 시간 동안의 외출에도 쉽게 지쳐 버렸다. 석율과의 문자 대화 역시, 그로서는 조금 피곤했다. 말 자체도 많은 편이 아니었거니와 얼굴을 보지 않는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오늘은 미리 가게를 닫아야겠다, 눈 사이를 손끝으로 꾹꾹 문지르며 생각했다. 관자놀이마저 간질거렸다. 음악을 틀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서 있다가, 의자 위로 주저앉아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

석율은 여태 답장이 없는 대화창을 다시 확인하고는 조금 굳은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햇살의 꼬리가 길게 늘어져 가게 안에 드리워져 있었다. 여유를 가장한 답변을 보내놓고는 틈만 나면 시선이 휴대폰 액정을 향하고 있었다. 본디 무심한 성격인 사람을 자신 쪽이 자꾸 괴롭히고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괜히 답답하고 서운했다. 이전보다 누그러진 것 같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래에게서는 벽이 느껴졌다. 그 벽이 답답해서, 자꾸만 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고 싶어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는 되찾은 이후 부적처럼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는 목걸이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어째서 저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인지, 물건을 왜 팔지도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한 것들이 산더미였다. 호기심만이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는 사람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거의 10분마다 답장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 잔째인 줄도 모르는 커피를 마저 들이킨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머리가 띵했다. 목청까지 전부 말라 버린 감각이 불쾌했다. 날숨에는 마른 기침이 섞여 있었다.

"나 알아요. 그거 싸이코매트리 아니에요?"

그 말을 던진 사람은 가게의 단골손님 중 하나인 안영이였다. 그녀는 다음날 카페 오픈 시간에 작업물을 잔뜩 들고 나타났는데, 중요한 마감이 몇 개나 겹쳤다며, 머리를 긴 대강 묶고 잘 쓰지 않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유명 패션 잡지의 기자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가끔 기자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모델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뻤고 패션 감각도 좋았다. 왜 아깝게시리 얼굴을 그렇게 써요. 마감 때마다 후줄근한 몰골로 나타나는 그녀에게 석율은 늘 한마디 했으나 영이는 그 때마다 웃어 넘길 뿐이었다. 잠깐 쉬고 있는 영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가게의 골동품으로 넘어갔다. 골동품점 주인의 특이함에 대해 이야기 해 주자,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기자로서의 본능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싸이코매트리? 반문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운을 떼었다.

"싸이코매트리. 초능력의 일종인데, 물건으로부터 기억을 읽는 거예요. 드물게 사물 뿐 아니라 사람과 접촉해서 기억을 읽는 사람도 있고, 기억 뿐 아니라 감정이나 여러 가지 다른 걸 읽기도 하는 모양이에요. 소위 말하는 '능력자'에 해당하죠. 영어로는 센티넬이라고도 하는데 들어본 적 있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뭐, 정부 보호나 '안내자'-가이드라고도 하는데- 없이 사는 걸 보면 그렇게 강한 능력은 아닐 거예요. 나도 몇 명 취재 때문에 만나 본 적은 있는데, 싸이코매트리는 직접 본 적 없어요. 좀 궁금하긴 하네. 만나 본 사람들 말로는 좀 예민하대요. 아무래도 접촉에 민감하다던데."
"아아…."

석율은 이마를 긁적였다. 나 마음대로 만졌었는데. 어쩐지 싫어하더라니, 사람이 낯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문제였나? 그렇다면 상당히 실례되는 짓을 한 셈이었다. 입술을 짓씹다가 혀로 쓱 핥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그를 힐끔 쳐다본 영이는, 문제가 있었다면 말을 했겠죠, 사물이 아닌 사람과 접촉해서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싸이코매트리는 정말 소수니까 걱정 마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야아, 영이씨야말로 싸이코매트리 아냐? …생각을 읽는 건 텔레패스라고 하는데, 훨씬 소수예요. 실실 웃으며 건넨 말은 농짓거리도 되지 못했다. 하여간, 빈 틈이 없어요. 쩝 입맛을 다시곤 턱 언저리를 매만졌다. 영이의 관심은 이미 다시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그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전화기는 며칠간 계속 잠잠했다. 괜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 답장이 도착한 것은 날짜가 수요일로 넘어간 이후였다. 나 참, 내가 문자 제 시간에 안 봤으면 어쩌려고 이런 시각에. 석율은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렸다. 며칠간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화요일 밤까지 대답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뭐, 그래도 답장이 온 게 어디냐 싶었다. 이 시간까지 고민하고 있었을 그 작은 뒤통수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습니다, 대답하던 때의 말투가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 데라고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만나온 사람 중 가장 묘한 사람이었다. 그럼 약속대로, 내일,아니지, 오늘 아침에 보시죠. 알겠습니다, 돌아온 답장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그답다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자꾸 오시게 만들어서……."
"내가 제안한 건데요 뭘."
"답장도, 좀 더 일찍 드려야 했는데."
"아, 그건 좀 서운했어요."
"……."

석율은 옷깃을 정돈하며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셔츠가 요란스러웠다. 그래는 그가 잡아 이끄는 대로 차에 올랐다. 가감 없는 석율의 답변에 고개를 드니 석율이 씩 웃고 있었다. 석율은 그래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이 조금 귀엽다 생각했다. 저렇게 빨가면, 좀 따끈하려나? 생각한 순간 손이 알아서 움직여 귓바퀴 위쪽을 쥐고 있었다. 온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원래도 선이 둥근 눈이 댕그랗게 커져 그를 바라본다. 아. 그제서야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이 맺혀 있었다. 작은 콧망울도 도톰하고 뭉글뭉글한 입술도 모두 너무 가까웠다. 목 뒤로 확 열이 올랐다. 아, 미안해요. 후다닥 몸을 돌려 시동을 걸었다. 곁눈질로 쳐다보니, 장그래는 석율이 잡았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괜히 제 귓바퀴가 얼얼한 것 같은 감각에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손가락 끝이 시려서,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허공에 손을 비볐다. 마음이 간지럽다. 너무 간지러워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나갈 것 같았다.
그 날은 낭만카페 사상 석율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한 날이었다. 그는 머그컵을 깨뜨렸고, 손님들의 오더를 뒤바꿔 서빙하는가 하면 아메리카노에는 시럽을, 아포카토에는 시나몬을 뿌려 내놓기까지 했다. 그의 얼빠진 모습을 볼 일이 없던 단골손님 몇몇이 카운터를 흘끔거렸고 참다 못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를 장그래의 옆자리로 쫓아버렸다. 그의 모든 얼빠진 짓들을 지켜본 장그래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무표정이었다. 아, 나 원래 안 이런데. 그래씨 알잖아요, 저번에 왔을 땐 괜찮았잖아. 석율은 구차한 말을 늘어놓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압니다. 그래의 대답은 늘 간단했다. 석율은 테이블에 머리를 파묻은 채 한참 말이 없다가,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가 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머그잔 속 커피에선 아직 따뜻한 김이 올랐다. 속 좀 차리라고 아르바이트생이 타 준 것이었다. 무심코 그 머그컵께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내가 마음대로, 먼저 읽어도 되나? 지금까지야 의식한 바가 없었다. 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문제들이었다. 잠시 손이 허공에서 맴도는 사이, 갑자기 닥쳐든 석율이 잔을 휙 치웠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그에게서 풍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커피 부족해요?"
"그게…."
"수현 씨, 여기 아메리카노 한 잔 리필해줘요."
"네? 네."

석율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옆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방금, 컵 뺏은 거 아닌가? 시선을 모로 돌린 석율은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래는 눈을 깜박였다. 문자에 답장하기까지 고민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원하는 거리감도, 석율이 원하는 거리감도, 무엇 하나 잘 알 수 없었다. 속마음을 알아보기 힘든 남자. 분명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가 어디까지 허락할 지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해서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이 줄 수 있을 만큼만 받아야 한다 생각하니 하염없는 막막함이 덮쳐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위인인가? 생각이 미치자 발 밑이 아찔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받자, 여기까지만 받자, 자꾸만 그렇게 받다가, 받아서 삼키다가, 문득 그가 더 이상 오지 말라며 선을 그으면, 휘청이다 넘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화요일 밤까지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벽을 넘긴 시각에 눈을 질끈 감고 보낸 문자에는 거짓말처럼 금방 답장이 왔었다. 마치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마치? 흐트러지려는 생각을 바로잡으려 다시 눈을 깜박였다. 석율은 여전히 그래 쪽을 쳐다보지 못한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깍지 낀 손가락으로 제 손을 두드리는 동작에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그는 거의 십여 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미안해서 어쩌죠. 식사 대접하기로 해놓고."
"잘 먹었는데 무슨 이야기에요."
"내가 해 줘야 의미가 있는 거지."
"다음에 해 주시면 되죠."
"…또 올 거예요?"

눈을 크게 뜬 얼굴이 돌아본다. 대뜸 말해놓고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와 줄 거예요? 다시 던지는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풀어지는 미소에 안심한다. 우스운 감정들이다. 망설이던 손이 가만히, 또 손등 위에 겹쳐진다. 아직도 적막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귀를 울리는 심장 소리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맥박은 석율이 잡았던 귓바퀴 위에서도 뛰고 있었다. 그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자니 석율도 제 눈치를 보는 듯 슬쩍 손을 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마른 침을 삼키고,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제는 익숙한 패턴이다, 생각했다. 모두가 서투른 제 탓이었다.

"미, 미안해요."
"예?"
"아, 닿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

겨우 말해놓고, 석율은 또 그래의 눈치를 보았다. 햇빛을 거의 쐬지 않아 말갛고 투명한 얼굴 위의 표정을 읽는 것이 아직도 버거웠다. 별것 아닌 말이 왜 이리 하기 어려운지, 얼굴이 타버릴 것 같았다. 뭘 이렇게 긴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는 가만히 석율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아아, 작게 중얼거렸다. 착 내리깐 시선 위로 남자 치곤 길고 섬세한 속눈썹이 흔들린다. 아닙니다. 그래는 눈을 몇 번 더 깜박였다. 속눈썹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검은 눈동자가 맑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석율을 똑바로 응시하며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작고 창백한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 석율의 손끝에 닿았다. 누구 것인지도 모를 체온 때문에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



트위터에서 많이도 징징댔던..4편입니다.

원래는 후기를 안 적는데 이래저래 쓸 말들이 생겨서 적어보네요.

제 징징 받아 주신 분들께 일단 감사를...연재가 익숙지 않은 관종의 징징댐...이라 생각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대충 분량으로는 1/3~1/4 지점을 통과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비축분 만드려던 시도는 장렬히 실패했네요...이전에 올리던 분량에서 자르면 너무 애매해지는 것 같아서...

전에 한 번 공지한 적이 있지만 서랍은 6편까지만 웹공개이고 뒷부분은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저 존잘 제목 캘리그래피는 티백( @TB_BT13 ) 님이 제공해 줬습니다. 티백님 사랑해 ㅠ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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