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5 -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오랜만입니다. 원고 일정이 바빠서 올릴 수 있는 글이 없었네요.

서랍은 일단 이번편까지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책으로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초보다 공개 분량이 조금 줄었습니다.

책의 판매에 대해서는 행사 일정에 맞추어 공지가 나갈 예정이고, 그 이전에 통신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수량조사만 선행될 예정입니다. 행사에 못 오시는 분께서는 꼭 통판 수량조사에 참여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 날 석율은 기어코 머그컵 하나를 더 깨먹었다. 그리고 난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한 달 여 동안 그래를 대하는 석율의 말은 점점 짧아졌고 석율을 대하는 그래의 태도는 점점 가벼워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의 수는 몇 배로 불어났다. 석율은 그래에게 존대와 반말을 섞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장그래는 여전히 존대를 하기는 했으나, 뾰루퉁한 표정과 짜증스런 말투를 보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일 아침마다 그래의 집 앞에 차를 끌고 나타났다. 장그래는 수요일마다 낭만카페 카운터 앞의, 새로 들인 푹신한 의자 위의 붙박이 가구가 되었다. 그는 오픈부터 마감까지 석율의 말상대를 해 주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테이블에 쿠션을 얹어 놓고 잠들어 있다가는 석율이 뿌듯이 쥐어 준 더치커피 병이며 디저트 따위를 들고는 돌아가곤 했다.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둘은 카페 대신 인적 드문 산책로로 나갔다. 날씨도 선선해졌고, 매번 카페나 가게에서만 있는 것도 지겨우니 한 번 나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석율이었다. 처음에 그래는 거절했으나, 결국 석율이 조르는 것을 이기지 못했다. 무더위가 끝나고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날은 그런대로 선선했다. 간만에 여름 옷을 입고 장갑조차 끼지 않은 장그래의 목덜미며 팔뚝은 여름내 햇빛이라곤 쬐지 않아 창백하다시피 희었다. 그리로 눈을 돌리지 않기 위해 석율은 애써 목에 힘을 주었다. 뻐근한 목 뒤를 스치는 바람이 선득했다. 장그래의 맨살은 더위에도 불구 서늘해서, 팔이 스칠 때마다 마른침을 삼키기 바빴다.

장그래씨, 선크림은 발랐어?”

힐끗 그를 올려다 본 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봐. 석율은 그 손을 잡아당겨 맨 팔뚝을 쓰다듬었다. 선크림을 바른 피부 특유의 미끈한 감촉이 묻어났다. 괜찮다는 대답을 들은 날 이후로 그는 장그래를 예고 없이 만져 대곤 했다. 그래는 매번 과하게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그렇다고 밀쳐내지는 않았다. 그저 익숙하지 않다는 듯 잡힌 손가락을 어색하게 꼼질거릴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 같아, 그 손을 잡고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번에도 시선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동그랗고 작은 귀도 새빨갰다. 아니, 귀 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


석율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래가 인상을 구기며 밀치는 바람에, 꼴사납게도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에 슬쩍 얹어두었던 선글라스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야야야. 그는 선글라스를 한 손에 쥐어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며 정장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항상 각이 잡혀있던 옷의 여기저기가 구겨지고 먼지가 묻어 지저분했다. 장그래는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석율과 제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넘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순하게 생긴 둥근 눈이 연신 깜박였다. 아우, 허리야. 석율은 머리카락을 한 번 정돈하고, 선글라스를 다시 정수리에 얹은 뒤 아픈 시늉을 하며 허리를 두드렸다. 장그래의 작은 얼굴은 아직도 붉었다.


……한석율씨가 갑자기 건드리니까 그렇잖습니까.”

그렇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장그래는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보다 입꼬리를 뭉개며 웃었다. 석율에게 잡혔던 손목 위로 불긋한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순간적으로 힘 조절을 못한 탓이었다. 제 상완 부분을 감싼 그래의 작은 손가락 끝에 분홍빛이 돌았다. 손을 뻗어서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넘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질거리는 주먹을 힘주어 꾹 쥐었다. 장그래는 피곤했는지 한숨을 쉬고 땀을 닦았다. 말갛던 뺨이 아직도 발갰다. 조용하네요. 툭 말을 건네자 가만히 끄덕이는 머리통은 제 손바닥을 펼치면 다 가려질 것 같았다. 새삼 거리를 좁혀 다가갈수록, 장그래는 손바닥 만 한 얼굴에 꽉 들어찬 이목구비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작았다.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면 쉬이 딸려오는 체중이 가벼워, 그는 저에겐 한 폭도 안 되는 비좁은 어깨가 사실은 체격에 비해 단단하단 것을 자주 잊었다.


그래도 조용하고 좋네요, 여기.”

.”

혹시 이런 곳에서도 들려요?”

……완전히 조용하지는, 않습니다. 트인 공간이면 그리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닙니다만.”

.”

"방음 안 되는 건물에서 들리는 옆 방 티비 소리보다 조금 작습니다."

엄청 거슬리는 거 아냐, 그거?”

…….”

그러면 말야. 장그래씨는 고요란 걸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나?”


장그래는 걸음을 멈췄다. 자신보다 조금 키가 큰 남자를, 시선을 비스듬히 들어 응시한다. 해가 석율의 얼굴 측면을 비추어, 긴 콧대로 인해 생겨난 그림자가 뺨 위를 지나고 있었다. 동양인 치고 굴곡진 얼굴 위로 진 그늘들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불어 흩날린 앞머리가 시야 위쪽을 어지럽혔다. , 이거 얼마나 공들인 건데. 석율의 앞머리도 같이 흔들렸다. 그는 투덜거리며 가르마를 바로잡았다.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안내자인지 뭔지 그건가? 그래, 장그래?”

.”


시답잖은 말장난 치고는 목소리가 근사했다. 목 안으로 웃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미소짓는 얼굴은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두툼한 손이 쑥 뻗쳐 와서는 앞머리를 정돈해 주고는 떨어져나갔다. 갑자기 웬 바람이야. 곧 저녁 먹을 시간인가? 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모든 동작이 조금씩 느리게 보여서, 그래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미간에 고였던 열이 이마 전체로 번져 있었다. 밥 먹으러 가죠. 눈이 마주치자 확 접힌 눈가에 잔주름들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무심코 팔짱을 풀고 서 있었다. 석율은 그의 손목을 낚아채곤, 등을 감싸듯 손을 얹어 이끌었다. 잦아든 소음 너머로 나뭇잎들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밀려왔다. 그래로선 처음 들어본 소리였기에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잎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빼앗겼다. 그래는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눈을 끔벅거리며 조수석에 앉았다. 그제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팔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화끈거렸다. 자국은 한참 사라지지 않았다.


 

 

***

 

 

다음 주엔 어디 갈까요? 조용하기만 하다고 되는 건 아니라 어렵네.”

또 나갑니까?”

, 지난 주 산책 별로였어요? 나는 꽤 괜찮았다 생각했는데.”

아뇨, 싫었던 건 아니지만.”

나가고 싶지 않아요?”

……당분간은 굳이.”

바깥바람도 좀 쐬면서 살아야지 머리에 곰팡이 핀다고.”


석율이 그래의 머리칼을 슬슬 헤집었다. 손을 잡는 것에 이어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쯧쯧대며 혀를 차는 소리까지 더해져 동물을 어르는 동작 같았다. 그래는 날 선 눈으로 그 손을 올려다보다, 제 손으로 잡아 끌어내렸다. 뿌리치려던 것이 다시 잡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으나 굳은살 잡힌 손이 단단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곰팡이요, 아니 말이 그렇단 거죠. 뾰족하게 되묻는 것을 능청스레 받아 넘기고는 씩 웃는다. 그가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날렵한 코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의 속눈썹까지도 낱낱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데이트 하죠, 나랑.”

싫습니다.”


그래는 의자에 앉은 채 상체만을 뒤로 뺐다. 석율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상체를 물렸다. 손님도 아르바이트생도 없는 카페는 조용했고, 틀어둔 음악마저 그래 취향의 잔잔한 클래식이었다. 석율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너무하네, 진짜. 나 이래봬도 한때 여자들한테 인기 완전 많았는데 즉답이야? 끝이 짧은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졌다.


다음 주는 좀.”


대뜸 대답했다. 뭔가 이어 말하려다 멈춘 석율의 눈이 빠르게 깜박인다. 까만 눈동자가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그래의 오른손을 겹쳐 잡고 있던 왼손가락들이 타다닥 리듬을 탄다. 분홍빛이 도는 얇은 입술이 미묘하게 울렁이다가는 씩, 말려 올라간다. 양 볼에 보조개가 옴폭 파고 들어갔다.


그럼 이 주 후? 삼 주 후?”

…….”

?”

삼 주 후로 하죠.”

오케이. 그럼 찾을 시간 많네.”


또 말려들었구나. 한숨을 내쉬었다. 석율은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의 코 앞에 손을 올려선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래가 흠칫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인상 쓴 미간 위로 손을 옮겨 문질렀다. 반듯하던 얼굴로 정색하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읽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는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가 석율의 손을 잡아 떼어놓았다. 잠시 머쓱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던 석율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는 손가락을 한 번 쥐었다 펼치고, 고개를 한 번씩 고개를 좌우로 꺾은 후에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도서관이나 박물관도 별로인가?”

박물관 정도는……. 아니, 왜 자꾸 이런 약속을 잡습니까?”

, 글쎄, 장그래씨가 좋아서 아닐까?”

…….”


도톰한 입술을 꾹 다문다. 흔들리던 시선이 비스듬히 꺾였다. 놀리지 마시고 저 커피나 좀 주십시오. 작게 중얼거렸다. 오케이, 오케이. 석율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정돈하며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히 만져도 괜찮다고 했나. 그 말을 하고,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이후 석율은 정말 예고도 없이 저를 덥석덥석 잡아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석율이 선사하는 고요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익숙하던 소리가 사라진 세계의 신비감이 다한 이후, 그 세계는 그에겐 벅찰 만큼 많은 새로운 소리들로 채워졌다. 타인의 마음 속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면, 새로운 소리들이 밀물처럼 그를 덮쳤다. 타인의 발소리, 숨소리, 옷깃이 부시럭대는 소리, 무언가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심장 소리 같은 것들이 쉽게 빈자리를 채웠다. 석율의 손이 스치는 곳이 새로운 심장이 되어 맥박이 뛰고 피가 돌았다. 그에게 닿았던 피부는 발진처럼 달아올랐고 울리는 심장 소리에 귀가 먹먹해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숨이 가빠졌다. 명치 부근이 답답해지는 감각을 겪기도 여러 번이었다. 정도는 갈수록 심해져서 지난 주 함께 산책한 이후로는 숨이 차 괴로울 정도였다. 능력 탓에 늘 자신에게 다가오길 꺼려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게 간격을 좁혀 버리는 석율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를 만나는 일은 점점 더 체력을 잡아먹었다.


자요, 여기.”

전 커피 달라고 했는데.”

좀 전까지 눈 완전 풀렸던데, 잔말 말고 비타민이다, 생각하고 마셔요. 눈밑이 아주 새까매, 요즘.”


석율이 커피 대신 내민 것은 망고와 레몬을 얼음과 함께 갈은 슬러시였다. 그는 그래의 짜증에도 태연히 제 눈가를 엄지와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웃기만 했다. 그래는 그를 가만히 쏘아보다가 빨대를 입에 물었다. 찬 것을 잘 먹지 못하는 그래를 배려해, 음료에는 시중 슬러시보다 얼음 양이 적었다. 새콤달콤한 과일향이 혀를 적시고, 고여든 침과 함께 식도를 타고 흘렀다. 조금은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맛있네요. 두 말 하면 아쉬운 소릴. 하핫, 활짝 웃는 얼굴이 여전했다. 석율은 제 몫의 커피를 내려 홀짝이며, 카운터 뒤에 마련된 의자에 그래를 마주 바라보고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박물관과 미술관 사이트들을 들락거리며 전시회 일정을 뒤적이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 클림트전!”

?”

내가 좋아하는 화가예요. 아나? 이런 느낌인데.”


석율이 손짓하는 것을 따라 모니터 뒤에 다가가 섰다. 석율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래를 의자에 앉히곤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찌푸린 눈을 흘겼지만 석율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니터에는 어디에서 본 듯한, 금색 바탕의 화려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본 적은 있습니다. 그래의 어깨에 얹힌 손가락들이 타다닥, 가벼운 리듬을 탄다. 석율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혀로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쓸고는 침을 삼켰다. 가늘게 뜬 두 눈이 힐끗 그래를 곁눈질한다.


왜 제 눈치는 보십니까? 가시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 , 그건 그런데. 서울에서 하는 전시회면 멀기도 멀고나 혼자 가거나 같이 갈사람 찾음 되니까. 장그래씨는 신경 쓰지 마.”

평일 오전이면 손님도 적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정말? 같이 가려고?”

왜 이렇게 매번 제 눈치를 보십니까.”

그러게, 나 이런 사람 아닌데 자꾸 이러네. 장그래씨랑 있으면.”

……재미없는 사람이라 미안하게 됐군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가 입술을 비죽였다. 푸흐, 석율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의 어깨를 고쳐 잡았다. 숙였던 상체가 조금 더 기울어져, 그래의 머리카락 위로 석율의 뺨이 스쳤다. 등을 단단하게 받치고 뺨을 마주 댔다. 어깨 뒤로 몸이 닿았다. 마른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져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쇄골이 도드라진 어깨를 몇 번 문질렀다. 입술을 쭉 내밀고,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한석, 그래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 누구예요? 못 보던 사람인데 새 알바?”

으악!”


석율이 호들갑스럽게 허리를 펴며 일어났고, 그래는 얼결에 책상 위로 허리를 숙였다. 짐을 들고 가게에 들어선 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 한숨처럼 내뱉곤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석율은 잠깐 그래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영이에게 바삐 다가갔다.


뭘로 하실래요?”

애인?”

, ㅇ…?”


흔들거리며 주문지에 애인이라고 끄적이다 눈을 댕그랗게 떴다. 화들짝 놀란 손이 엇나가 큰 가로선이 찍 그어졌다. 다행히 그래는 석율의 컴퓨터를 만지작대느라 이쪽 대화는 못 들은 눈치였다. 그제야 휴, 숨을 돌리고 영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백 퍼센트 의심하는 눈빛이다. 발뺌해도 씨알도 안 먹히겠군. 기자 일을 해 온 만큼 안영이의 눈치는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석율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분위기는 그렇던데.”

하하아직은 아니에요.”

아아, 아직. 혹시 전에 그 싸이코매트리예요? 나도 얘기해 보고 싶었는데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어우 안영이씨 진짜 돗자리 까시죠. 텔레패스야 뭐야?”

아닙니다 한석율씨. 그래서 소개는요?”

……안될 건 없지만.”


여전히 농담이 통할 구석이라고는 바늘 찌를 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가끔 이상한 걸 보고 웃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영이의 대학 동기인 백기로부터 들은 일이 있었다. 그래 쪽을 힐끗 쳐다본 석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손으로 펜을 빙빙 돌리다 입가로 가져간다.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왜요, 내가 장그래씨 꼬시기라도 할까봐? 웃으며 건넨 농담에,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농담이 지나치네, 안영이 씨도. 대답하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없었다. 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율은 얼른 다시 웃었지만, 여전히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카페에 다닌 지 제법 되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장난을 걸어도 별로 넘어오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잠시 눈을 깜박이다,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드립 되죠? 콜롬비아 수프리모로.”

오케이.”

한석율씨, 할 말이 좀 있는데 괜찮아요?”

뭡니까?”

나는 능력자들이랑 많이 만나 봐서 아는데 별로 깊게 엮일 마음은 없으니 안심해요. 근데 장그래씨한테 안내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능력자의 정신 안정에 안내자가 필수라는 건 알죠? 곁에 없으면 보통 제정신 유지하기 어려워하고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섹스라는 것도…….”

…….”


석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애인이라는 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문지를 펜으로 문질러 지웠다. 그리고 그 아래에 휘갈기듯 원두 이름을 받아적기까지 말이 없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짤막한 말에도 억양이 없었다. 카운터로 돌아와 보니, 그래는 한 팔을 괸 채로 클림트의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잠깐 후, 숨을 뱉고, 다시 웃는 얼굴을 꺼내들었다. 그림 마음에 들어요? 그래의 시선은 홀린 사람처럼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쁘네요. 석율의 가게를 처음 보았던 때의 감상처럼 담담했다. 석율은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래서 갈 거예요? 괜찮겠어? 간다고 하면 최대한 오픈시간에 맞춰 가서 점심 전에 나올 수 있게 해 볼게.”


말하는 사이에도 손이 분주했다. 석율이 서버 위에 필터를 얹은 드리퍼를 올리고, 로스팅해서 갈은 원두를 담기까지 그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스탠 주전자를 기울여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었다. 커피가 필터를 통과해 똑똑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다 뒤통수가 간지러운 느낌에 돌아보니 그래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갈래요? 석율이 다시 물었고 그래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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