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그래]오문매괴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퇴고 전 글입니다. 실제 소장본에서는 수정될 수 있습니다.



1.

한석율이에게 애인이 생겼다더라, 하는 소문이 澳門(아오먼) 뒷골목 구석구석에 짜아하니 퍼지는 데에는 채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그 계집 치맛보에 대가릴 처박고 나올 줄 모르던 好色漢(호색한)에게 애인 하나 생긴 것이 무에 대수냐, 싶을 것이나 그가 애인을 들이고는 기방이며 주점에 걸음을 뚝 끊었다는 데에야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한석율이가 누구인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오먼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三合會 新義安(삼합회 신의안)의 우두머리인 한 대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할 막내아들이 아닌가. 본처 출신 두 아들과 달리 어미를 닮아 용모가 곱상한 청년은 일찍부터 제 입지를 알아 허투루 나대는 법이 없이 주어진 돈과 시간을 제 의무인 양 허비했다. 논다니들의 가슴께에 고개를 처박고 얼간이 짓을 할 때마다 탐욕스런 계모와 이복형제들은 코웃음을 쳤다. 저는 후계도 재산도 관심이 없으니 그저 지금처럼 계집이나 끼고 놀게 해 주십사 고개를 조아렸을 때에는 절로 고개가 뻣뻣해졌다. 그들은 언제고 마음을 바꾸어 손바닥으로 벌레를 잡듯 석율을 죽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를 함부로 해내기란 꺼림칙한 일이었다. 석율의 어미는 출신도 불분명한 밀입국자였고 한 대인이 석율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오늘내일하였다. 조직 내에서 뿌리내릴 곳도 없는 천덕꾸러기인 석율의 뒤를 봐 줄 사람이야 어차피 제 친부밖에는 없어서, 그는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할 망나니 한량으로서 제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혼례조차 치르지 않고 기방만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그를 한심하게 보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의 주변에 모이느니 입 안의 혀 같은 奸侫輩(간녕배)의 무리였으나 석율은 그런 엉터리들과 실없이 어울려 히히덕거리기 바빴다. 최근에는 노름에마저 손을 대어 판돈만 미제 달라로 넉 자리 수를 날려먹었다느니, 조직에서 유통하는 大麻(대마)阿片(아편) 따위에 손을 대었다느니 하는 말이 나돌았다. 그가 지난 십여년간 벌이고 다닌 奇行談(기행담)만 해도 하룻밤을 꼬박 새울 만치로 쌓여 있었다. 둘째 형이 사고로 아내를 잃고 외팔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계집과 놀아나다 뒤늦게 헝크러진 차림으로 장례에 나타나는 바람에 문전박대를 당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질긴 안주감이 되어 주었다. 저놈 저것이 집안 망칠 波落戶(파락호)가 아니고 무어냐, 조직의 더러는 손가락질했고 더러는 그의 팔난봉을 좋은 구경거리쯤으로 삼았다. 그 허랑방탕한 석율의 머리꼭지를 잡아 돌려놓은 애인의 정체에 대하여 온 시장바닥이 입방아를 찧어댔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대단한 조직의 고명딸인데 성질머리가 독사 같을 것이라는 둥, 천하에 둘도 없는 절세미녀일 것이라는 둥, 오만 가지 소문과 십만 가지 풍문들이 출처도 없이 만들어져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얼굴도 나이도 불분명한 석율의 애인은 아오먼 뒷골목 주점에서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술안주였다. 그 정체에 걸린 판돈만 해도 젊고 잘 나가는 기녀 한 명을 기루에서 빼 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만 무성하던 애인의 정체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밝혀지고 말았는데, 바로 석율이 제 생일잔치에 그를 허리춤에 끼고서 나타난 까닭이었다.

그날따라 그는 쓰리피스 정장까지 때깔나게 갖추어 입고는 시종 허리춤에 사람 하나를 끼고서 사람들 틈바구니를 누비었던 것이다. 아오먼 최고의 양아치답게 전신에 점박이 무늬가 박힌 양복 상하의며 목에 두른 꽃무늬 스카프가 보기만 해도 야단스러웠다. 늘상 포마드를 발라 칼같이 빗어 넘기는 오대오 머리 아래의 귀 밑 단발은 차라리 새침하였다. 그러나 장바닥에서 高粱酒(고량주)를 걸치며 공내기를 하던 그 누구도 석율이 옆구리에 찬 자가 누구인지 묻지 못했다. 쏙 들어간 허리가 한 줌은 될까, 낭창한 몸을 한 그는 척 보아도 이 바닥에 흔한 얼굴은 아니었다. 외지인인 것인지 앵두알마냥 붉고 톡 튀어나온 입술을 꼭 닫고 말이 없다가, 석율이 이따금 귀엣말을 할 때에만 무에라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속삭이듯 답하는 것이었다. 뭉툭한 붓으로 그려낸 듯 눈매며 콧망울이며 얼굴선까지 모두 둥글둥글했다. 새카만 머리칼은 허리까지 덮여 석율의 팔뚝 위로 살랑거렸다. 머리카락 색과는 대비되는 낯빛이 희고 창백하여 피부 아래의 실핏줄이 드러나 보일 듯 하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둥근 귀는 耳釘(이정)의 흔적조차도 없이 깨끗했다. 마른 몸에 착 달라붙는 旗袍(치파오)는 희었고 그 위로 붉은 玫瑰(매괴) 자수가 흐드러져 어지러웠다. 체구에 비해서는 마른 어깨가 각지고 가슴이 판판하였지만 옆으로 트인 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흰 다리는 늘씬했다. 그는 익숙지 않은 여성용 구두를 신고서 걸음을 뗄 때마다 비틀거렸다. 그래, 말하자면 여장을 하였으나 누가 봐도 명백한 사내였던 것이다. 개중에는 놀란 나머지 와인을 줄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비역……!” 큰 소리를 내며 삿대질을 하던 사내는 다른 사내에 의해 발이 밟혀 질질 끌려갔다. 석율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에는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가 차츰 어수선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오직 괄시에 숨이 익은 석율과 그의 옆구리에 귀한 장식품처럼 붙은 청년만이 와중에 태연하였다. 노골적으로 따라붙는 호기심과 혐오 섞인 눈길에도 석율은 함박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옴폭 들어간 보조개 골마다 즐거움이 가득 고여 있었다.


小好(소호), 이쪽으로.”


造淸(조청)에 푹 절인 음성이다. 糖菓(당과)마냥 혀 끝에서 구르는 것이 달콤하였다.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쓰다듬는 손길에는 다정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이마를 가까이해, 한참 蜜語(밀어)를 속삭인다. 별 반응이 없는 상대를 두고 혼자 목울대를 삼키며 키득거린다. 석율은 집중된 이목을 아예 보지 못한 양, 태연히 눈을 접으며 웃었다. 진한 펜으로 그려낸 듯 선명한 쌍커풀이 거푸 깜박였다. 소호라 불린 청년은 무표정하였으나 다만 분칠로 덮지 못한 귀 끝의 여린 살갗이 붉게 달아 있었다. ()라니, 무엇에든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오묘한 어감이었다. 회장에 모인 사람 치고 석율이 계집과 놀아나는 것을 보지 못한 자가 드물었으나 계집에게조차 보이지 않았을 정도의 살가운 태도에야 굳은 얼굴의 간부들까지도 온통 웅성거렸다. 삼합회 내에는 알게 모르게 鷄姦(계간)하는 자들이 있어, 더러는 그 애인의 성별보다도 석율의 그런 모습에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파티가 시작할 시간에 이르자, 석율은 가벼운 걸음으로 코가 뾰족한 에나멜 구두를 흔들며 연회장 정면에 마련된 演壇(연단)에 올라섰다. 그가 옆구리에 철석같이 붙여 데리고 다녔던 청년은 연단 아래에 마련된 의자에 곱게 앉혀져 있었다. 한 대인의 권위만큼이나 사치스럽게 유리와 한지로 장식된 조명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여, 검은 머리칼이 일견 갈색으로 보였다. 그려서 걸어놓은 것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석율은 특유의 명랑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오신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의례적인 말이다. 석율을 축하해줄만한 이가, 적어도 그가 좀 전까지 한팔에 꿰어 다니던 청년이면 모를까, 장내에 없음을 석율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자신보다는 아비의 부와 권세에 등이라도 비벼보고자 모인 인물들이었다. 그는 눈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면서도 차가운 눈빛으로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경청하는 것 같은 표정이되 다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흔한 인사를 늘어놓은 뒤 손을 들어 건배하고, 잔에 든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단숨에 목청을 타고 넘어 머리로 치달아 오르는 술기운이 썩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고, 늘 벌을 서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던 머리 아픈 행사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오늘은 여러분께 축하받을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 같지만, 저에게 드디어 情人(정인)이 생겼습니다. 저기 보이는 미스터 장입니다. 남자 정인이라 놀라신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만, 저는 그와 정식으로 婚禮(혼례)도 올릴 생각입니다.”


그제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석율의 왼손 약지에 끼인 반지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그래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말은 청산유수로 나갔고, 연회장이 술렁이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사람들이 토끼눈을 하고 석율과 한 대인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으나 한 대인도 석율도 이미 예상했던 청중의 반응이었기에 큰 동요가 없었다. 한 대인의 부인 역시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어, 석율을 부호에게 장가 보내지 못해 한밑천 챙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이로써 남자 배필을 맞게 된 석율이 영영 조직의 후계 문제에서는 발을 뺀 것이나 마찬가지라 여겨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했다. 한 대인의 경우에는, 그가 일평생에 유일하게 사랑했다던 여인의 눈을 그린 듯 빼어 박은 석율의 두 눈 앞에 들어주지 못할 청이 없었다. 매 해 생일마다 석율이 가지고 싶다 바란 것은 대체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이번 생일의 경우 그것은 석율이 파티 내내 보석보다도 소중히 품어 떼어놓질 않는 청년, 장그래였다. 멀기도 먼 조선 땅에서 흘러흘러 들어온 장그래는 현지인들이 알아듣기 어려워하는 이름 대신 그저 예스 장, 아니면 장 호, 라고 불리곤 했다. 석율은 그 이름이 하나하나 예쁘다며 애정을 담아 본명을 부르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小好(소호)라 부르길 즐겼다. 그래에게도 저를 燏燏(율율), 아니면 小燏(소율)이라 불러 달라 청했다.





2.

그 날 새벽부터 당장 불이 났던 것은 한 대인의 전화도 아니요, 석율이나 그래의 전화도 아니었다. 전화통 앞에 붙잡힌 사람은 다름 아닌 오상식이었다. 그저 신의안이 관리하는 한 구역에서 부보스 자리를 맡고 있을 뿐인 그에게 갑자기 괜한 안부를 묻는 전화들이 쏟아진 까닭은 장그래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아는 사람은 아는 장그래의 代父(대부)였던 것이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밤새도록 전화가 끊이지 않는 통에 결국 상식은 전화선을 뽑아버렸고, 와글와글 몰려든 기자단을 강제로 해산시킨 후에야 간신히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집 앞에는 그의 차 대신 다른 사람이 보낸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석율이냐? 그는 담담히 문을 열고 물었다. 낯익은 기사가 그를 보고 인사했다. 기사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고급스러운 음식점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석율아, 나는 그래도 너도 아들처럼 생각했다.”

압니다.”


음식이라곤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고, 그저 周公百歲酒(주공백세주) 한 병만을 주문했다. 석율은 술을 따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상식은 미간을 좁힌 채 담배만 뻑뻑 마셨다. 신경이 예민해 늘 밤잠을 설치곤 하는 상식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눈가가 붉었고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카락이 정신 사나웠다. 십 대 때부터 보아온 상식은 석율에게 삼촌 같은 사람이라, 밖에서야 존대를 받을지언정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下待(하대)가 더 익숙했다. 그가 그 술잔에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석율의 미간이 아주 잠깐 찌푸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 하필 그래냐. 그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바라기만 하면 직접 꺾을 필요도 없는 꽃이 아오먼에 지천인데 왜 그 애냐. 그것은 한탄에 가까웠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숙부님.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 허락이라도 미리 구했어야지.”

미리 허락을 구했으면 승낙하셨을 겁니까?”

미쳤냐. 너 같은 양아치한테 내 아들 같은 놈을 내주게?”

거 보십시오.”


, 이놈이 이제 머리가 굵었다 이거지. 상식은 혀를 찼다. 석율이 처음 따라 올렸던 술을 테이블 위에 확 뿌려버렸다. 테이블보를 적신 술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고이고, 석율의 옷에도 튀었다. 그가 아끼는 옷 중 하나였으나, 역시 잠시 미간을 찡그렸을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묵묵히 일어나 잔을 다시 채웠다. 이번에는 정통으로 얼굴에 술 세례를 받았다. 웬만한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어찔거리는 독한 도수의 술이 머리카락을 적시고 얼굴과 턱을 타고 흘렀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거의 허리를 접다시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허락하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도 선언하러 온 것뿐입니다. 세 잔 째를 올릴 건데, 이번에도 안 드시면 저 그냥 가겠습니다.”

…….”


석율을 죽일 듯 노려보던 상식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돌린 채로 입에 물었던 담배를 세게 들이마셨다가 훅 뿜는다. 석율은 침착하게 술잔을 다시 채웠다. 상식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다시 푹 숙인 동그란 정수리만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선택지란 걸 주지도 않고 말이야. 젊은 놈이 건방진 것도 有分數(유분수)……. 그는 말꼬리를 흐리곤 눈앞의 술을 한 번에 전부 마셔버렸다. 잠깐 머리가 띵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석율은 활짝 웃고 있었다. 징그러운 소리 치워라, 자식아. 그는 주먹으로 그 잘난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눈까지 확 접히는 미소는 기루의 계집들이라면 환장을 하는 얼굴이었지만 상식에게 먹혀들 종류의 수단은 아니었다. 그는 갈라진 앞머리 사이의 이마를 또 한 번 세게 쥐어박았다.


, 조카 머리 나빠집니다.”

너 같은 조카 둔 적 없다.”

그럼 사위 할까요?”

한 대 더 맞을 테냐?”


어이쿠, 석율이 얼른 머리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상식은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몇 개만 더 묻자.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앉으며 되물었다. . 대답드릴 수 있는 건 대답 드리죠. 석율은 문가를 곁눈질하고는 상식이 따르는 술을 받아들었다.


진짜냐?”

아닙니다. 그런데 진심입니다.”

더 나쁘군.”


석율은 고개를 돌리고 넘치도록 부은 한 잔을 단번에 마셨다. 그의 대답에 상식은 인상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주거니 받거니 할 기분은 영 아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점을 나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석율은 또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상식은 나오자마자 차에 타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카오 땅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만 해도 장그래는 고작 열두 살의 새파란 내기 바둑꾼이었다. 밀수꾼 배에 숨어 萬里他鄕(만리타향)까지 흘러든 사정이야 말 해봤자 입만 아플 일이다. 서로 사연만 털어도 사흘 밤낮인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뒷골목에서 몸집 작은 소년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악질 손님에게 걸려 잘려나갈 뻔한 손목을 보전한 것은 天運(천운)이라 할 만 했다. 그 바람에 상식의 손에 이끌려 그가 관리하던 카지노의 벨 보이가 된 것이 다행한 일인지 아닌지는 그를 주워 온 상식조차 확신이 없는 문제였다. 소년의 身邊(신변)은 보장되었을지언정 그는 범죄자들과 섞이어 자라며 그 또래 소년은 몰라도 좋을 技術(기술)들만 골라 익혔다. 학교에 갈 가능성도 遙遠(요원)하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아이만도 至賤(지천)인 곳에서 그만하면 행운이라 불러도 좋지 않으냐 싶다가도 그 하얗고 얼굴과 까만 눈을 한 말간 소년은 좀 더 無智(무지)해도 좋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언제까지고 그의 담배 필터 끝에 뭉쳐 끈끈하게 입가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도 병입니다. 동식은 맞담배를 피우다 말고 한숨을 뱉었다. 니가 보기에도 그냐? 상식은 다 태운 담배를 던지고 킬킬 웃으며 새 담배를 빼물었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얘 인생이 앞으로 더 큰 폭풍에 휘말릴 것 같아 늘 불안한지 모르겠다, 동식아.

머리가 좀 자란 이후로 카지노에서 그래의 역할이란, 자릿수가 안 맞는 판에 앉아서 적당히 판돈을 불려 주거나 너무 따는 손님이 있을 때 판세를 조절하는, 이른바 바람잡이였다. 처음에 상식은 크게 반대했지만, 조용히 벨보이나 딜러로 버려두기에는 타고난 담력이며 닦아온 자질이 아까울 정도였다. 장그래는 바둑을 두던 머리 덕인지 그는 룰을 배우기가 무섭게 카드 놀음에 적응해 버렸고, 수 싸움에도 능수능란했다. 결국 나 때문에 어린 놈이 손을 버린 거라며 상식은 자책하였으나 그래는 개의치 않았다. 아저씨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목숨입니다. 말갛게 웃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겨울옷조차 제대로 없어 한겨울에 맨발로 가게 밖으로 끌려나왔던 그래의 메마른 손을 쥐고 데려와선 死産(사산)되었던 저의 아들이 生還(생환)한 마냥 愛之重之(애지중지)한 세월만 십 년을 넘어갔다. 어디 참한 처녀나, 그것이 이 동네에서야 千金(천금)이나 阿片(아편)이 차라리 덜 귀할 것임에도, 하나 있으면 그리로 장가를 보내 어디 棋院(기원)이나 꾸리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何必(하필)이면 사내인 것도 모자라 온 마카오에서 알아주는 놈팽이 閑良(한량)이라니, 그래의 배필로서는 한참 미달이었다. 더욱이, 그는 신의안의 일원으로서 석율이 그래를 원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주 잘 알았다. 석율은 영리한 청년이었다. 양아치 짓을 하는 것에도 그래를 공개적으로 취한 것에도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그물망처럼 치밀한 靑寫眞(청사진)을 바탕으로 한 행동들이었다. 그가 그래에게 주고 싶었던 평범한 삶 같은 것은 이제 畵中之餠(화중지병)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상식은 씁쓸히 한숨을 쉬었다. 가끔 이럴 때는 감이 좀 빗나가기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 한탄 섞인 혼잣말이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무릎 아래가 썰렁해진 것 같은 기분에, 괜히 멀쩡한 양복의 바짓단을 한 번 털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일을 알 리 없는 장그래는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앉은 참이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펼쳐들었던 朝刊新聞(조간신문)을 말없이 내려놓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 테다. 어색하게 여장을 한 저의 사진이 신문 1면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카지노 업계의 巨物(거물) 한영후 회장의 蕩子(탕자) 한석율이 이번에는 男色(남색)을 한다더라, 내지는 남성간 혼인의 부당함을 吐露(토로)하는 요지의 기사들로 도배된 신문들은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렸다. 기사에는 저에 대한 별다른 근거 없는 추측성 발언들까지도 亂舞(난무)했다. 그야 기자들로서는 장그래의 존재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장그래는 일개 노름판의 도박사 중 하나로, 그나마도 딱히 이름이 알려진 有名人士(유명인사)도 아니었으니 하다못해 어디 부호의 딸이 아니면 조직 내 부두목의 딸과 혼인할 것이라 여기던 언론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생뚱맞았다. 하물며 성별까지 남자였으니 잘 말린 纜魚(남어) 부럽지 않게 고소하고 질긴 안주거리였다. 실제로 많은 기자들은 그의 생김새에 대하여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어여쁘다느니 남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식어로 가득한 기사문을 읽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심지어는 남성과 남성 간의 禁斷(금단)의 사랑에 대한 감수성 넘치는 연애소설에 가까운 기사들까지 있어, 방금 먹은 식사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신문은 안 보시는 게 좋을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하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혼자 목욕을 마치고 습관처럼 조간신문을 집어든 참이었다. 석율의 취향대로 꾸며진 욕실은 너무 크고 화려했고, 몸에서는 온통 장미향이 나 어지러웠다. 억측이 난무하는 다른 기사에 비해서는 조금 읽을 만 했다. 街談巷說(가담항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작성된 기사에서는 출처불명의 억측도 많았지만 드문드문 비교적 정확한 내용이 실려 있기도 했다. 겨우 하룻밤사이에 그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생각하니 괜히 뒷목이 서늘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죄다 장그래의 정체나 그의 성별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석율이 예상한 대로였다.


너무 충격적인 정보를 한꺼번에 주면 제일 자극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서 나머지는 놓치거든.”


데뷔부터 화려한 口舌數(구설수)와 함께 했던 사람답게 석율은 언론의 性情(성정)을 손금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 한 대인의 손에 이끌려 패밀리의 일원이 된 날부터 온갖 크고 작은 스캔들로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문제아였고, 기자들을 한 눈 팔게 만드는 일은 그에게는 누워있는 소를 타는 일 만큼이나 쉬웠다. 사기를 치려거든 제대로 쳐야 한다며, 석율은 구태여 진짜 다이아를 박은 반지를 샀다. 그 작은 보석이 너무 무겁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석율이 주장한 바대로, 반지는 제 몫을 다 한 셈이었다. 낭만적인 포장지에 겹겹이 싸인 두 사람 간 약혼의 정체는, 사실 契約婚(계약혼)이었던 것이다.


어쩌다보니 석율과는 기이하고 질긴 인연이었다. 그러나 수 년 전 그와 처음 만날 때만 하여도 이런 관계가 되리라 생각해 보지 못했다. 석율이 카지노에 자갈처럼 굴러다니는 왈패들과 다른 점이라곤 제 것 아닌 권세를 등에 업고 다닌다는 것 정도였다. 마카오 곡곡의 카지노가 한 대인의 손아귀 안이었으므로 그의 존재는 카지노 업체들에게 별다른 득도 실도 되지 않으면서도 귀한 손님이라는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래가 한석율과 만난 곳도 도박판이었다. 그가 카드패보다는 제 얼굴이나 손을 더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의 어떤 면이 석율의 눈에 들었는지는 몰랐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가 석율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였다. 다른 테이블에서 카드를 하고 있어도 슬쩍 옆자리에 와서 앉는가 하면 잠깐 쉬는 틈에 다가와 말을 붙이기도 했다.

석율이 그래를 상대로 잃은 돈만도 꽤 되었다. 그는 돈만 많을 뿐 기술을 쓸 만한 여지도 없는 下手(하수)였으나, 기실 별로 따려는 의지도 없는, 노름이 아닌 놀음을 즐기는 손일뿐이었다. 그럼에도 또 사람이 격식이 없다 보니 한두 번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곧 편하게 대하게 되어 버렸다. 그나마 여리한 몸을 보고 수작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경우 없는 진상들보다 훨씬 나았다. 카지노에는 화장실까지 쫓아와 개수작을 걸어오던 발정난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대인의 아들이라고, 그가 꽤 귀애한다는 것만으로도 수고비가 추가로 나와서 그래로서는 꽤 쏠쏠한 손님이었다. 그가 석율과 자꾸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상식 정도였다. 그런 놈팽이랑 어울리다 물든다. 둘만 있을 때면 그는 사뭇 진지한 잔소리를 했다. 그래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남몰래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총 쏠 줄 알아요?”

?”


어느 정도 얼굴이 익었을 때였다. 그래의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그가 불쑥 물었다. 그래는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카지노에서 불량배와 섞여 자라며, 그가 배운 기술은 비단 도박만은 아니었다. 어리고 英敏(영민)한 소년의 머리는 海綿(해면) 무엇이든 쉽게 흡수해서, 그를 키우던어른들이 재미삼아 가르친 雜技(잡기)까지도 전부 손에 익었다. 자물쇠를 따고 여러 비합법적인 도구를 다루는 방법, 격투술, 그리고 간단한 무기를 다루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고, 당연히 총도 그 중 하나였다. 키나 체격 면에서 잘 자라지 못한 그래는 특히 사격 연습에 꽤 공을 들여서 그 실력은 상식의 옆에서 경호를 서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상식은 질색팔색하며 인원수가 부족할 때에만 그래를 세웠다. 그러고 보면 작년 석율의 생일 연회에도 따라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장그래를 석율이 기억할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 석율은 연단에 서서 잠깐 인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맞는 것 같은데.”

…….”

내 생일에 왔었죠.”


, 그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느 틈에 담배를 끈 석율이 몸까지 살짝 숙여 그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눈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고개를 좌우로 여러 번 흔드는 모양새가 지나치게 기이했다. 방금 피운 담배 냄새가 코에 싸아하니 끼얹혔다.


상식 큰형님 옆에 있었던, 아니에요?”

……어떻게…….”

이런 고운 얼굴은 잘 안 잊어버리지. 못 보던 얼굴이기도 했고……, 처음에는 큰 형님이 어린애한테 손을 댔나 생각했는데, 그럴 분은 아니시고.”


그가 눈을 확 접으며 싱긋 웃었다. 건들거리는 어깨가 경망스러웠다. 착 내리깐 시선이 빠르게 그래를 훑었다. 차가운 것이 얼굴을 확 스치고 내려간 것 같은 감각에 그래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처럼 던진 말이라고는 해도 상식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했다. 그럴 바에야 자신의 험담을 듣는 것이 낫다 생각할 정도였다. 그나마 추근대지 않아 나은 치라고 생각했는데. 석율의 손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탁 소리가 나게 쳐냈다.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괜히 손을 한 번 뒤집어 본 그가 중얼거렸다.


야멸차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으로 하실 말씀과 안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거 참……, 미안해요, 미안.”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양 손을 들어 보였다. 성의 없는 사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시러배에게 하나하나 진심으로 반응해봐야 감정 낭비였다. 한숨을 내쉬고, 옷을 탁탁 털어 정리했다.


그래서, 갑자기 총은 왜 물으셨습니까?”

……사실 사격을 잘 한다는 건 이미 대충 들었어요. 상식 형님께 당신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묻지도 않은 자랑을 늘어놓으시더라구. 이동표적도 잘 쏜다면서요?”

…….”


아저씨께서 또……. 그래는 작게 한숨지었다. 상식은 그래의 일이라면 八不出(팔불출)이었다. 아닌 척 하며 있는 대로 자랑을 하는 것이 자식 자랑하는 부모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사람도 쏠 수 있나?”


옷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석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쏠 수 있다고 하면, 큰 건수 하나 주려고 하는데. 그가 씩 웃으며 자세를 바로 고쳤다. 큰 돈 필요하지 않아요? 둥근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도박판을 전전하며 수없이 보아온, 꾼의 눈이다. 흥정하는 장사꾼의 눈, 또는 승부수를 던지는 도박꾼의 눈. 소맷단 안에 흑돌 두어 개는 예사로 숨겨놓았을 인상의 사내가, 여전히 눈빛만은 날카로운 채로 활짝 웃었다.



3.

한 대인이 銃擊(총격)에 당했다.

그 짤막한 문장이 신의안과 마카오 일대에 가지고 온 충격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마카오의 무엇 하나 신의안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신의안의 무엇 하나 한 대인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한 대인이 마카오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가 쓰러지자 작은 도시국가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신문과 뉴스는 연일 그의 被擊(피격)과 그 배후에 대한 기사로 도배되었고, 조직 전체가 암살 주모자 수색에 여념이 없었다. 괴한을 쏘아 그를 생포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한 대인 대신 독이 섞인 차를 마셔 혼수상태에 빠진 장그래는 조직 내의 영웅이 되었다. 지금껏 그의 성분을 의심하던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重態(중태)에 빠져 面會(면회)조차 받지 않는 그의 병실 앞에는 선물이라도 전하려는 이들이 門前成市(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에 대한 평가가 상승함과 동시에 훌륭한 배우자를 선별했을 뿐 아니라, 보스의 부재 상황에서 범인 수색과 어수선한 조직의 정돈에 큰 공을 세운 석율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석율은 한 대인이 총격을 당하고 3일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소가 없어 사람들을 모은 연회장은 약혼식을 대비하여 꾸미다 말고 급하게 치운 흔적들이 역력했다. 불길하다 하여 검은 장막을 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분위기는 더욱 어색했다. 어두운 색 양복에,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 정리한 석율의 얼굴은 도저히 수 일 전까지 물방울무늬 셔츠에 단발머리를 하고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던 양아치와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간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沈痛(침통)한 얼굴로 나타나, 반드시 아버지를 습격한 괴한에게 복수할 것임을 선언했다. 의복과 머리모양뿐 아니라 표정과 행동까지도 묵직해져 있었다. 삼일 밤낮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아버지와 연인의 병실 앞을 지킨 탓에 늘 혈색이 좋던 얼굴까지 반쪽이었다.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석율의 태도와 외양은 그에 대한 신뢰를 키우는 쪽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사건이 勃發(발발)함과 동시에 해외로 도피한 맏아들 상현은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이 불과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사람의 피격 소식에, 상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길길이 뛰며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길을 막는 사람들을 전부 뿌리치고는 석율의 멱을 잡아 벽에 몰아붙였다. 상식을 떼어내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석율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야 이 자식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로 씩씩거리는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새빨갰다. 석율은 그를 뿌리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상식이 내지른 주먹이 석율의 턱을 정통으로 갈겼다. 석율이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형님.”

우리 애 눈 못 뜨면 너랑은 絶緣(절연)이다.”

죄송합니다.”


뒤쫓아 온 동식이 상식의 어깨를 짚었다. 동식을 힐끗 돌아본 상식이 씩씩거리는 숨을 골랐다. 석율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벽을 짚고 일어섰다. 대부께서는 괜찮으신 거야? 동식은 그가 옷매무새를 고치는 것을 부랴부랴 도우며 물었다. 석율의 얼굴에 잠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곧 사라졌다.


아버지께서는 다행히 급소를 빗겨 맞으셨습니다만 연세가 있으셔서 한동안 안정이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암살기도의 위험이 있어서 고비를 넘기시는 대로 안전한 곳으로 한동안 피신시켜 드릴 생각입니다.”

그래는?”

……죄송합니다. 의사 말로는 내일이 고비라고…….”

도련님, 저는 도련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래를 데려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애는 아니니까 본인이 판단한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래도…….”


동식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 독특한 목소리에는 체념한 것 같은 어조가 묻어 있었다. 그가 입술을 비죽 내민 채로 석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늘 푸근하고 둥글둥글한 인상의 동식이었으나 이따금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면 표정이 날카로워, 상식과 함께 최전방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年輪(연륜)이 얼핏얼핏 드러나곤 했다. 그가 한 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떼었다.


그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도련님 평생 용서 못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