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율그래 단문 백업
- TEXT/미생
- 2015. 4. 26. 00:15
- Posted by 유렌
#1. 고딩 율래
장그래,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팔뚝이 가느다랗다. 다 쓰고서 돌아보는 흰 얼굴 위로 햇빛이 확 부서졌다. 창 밖에서 발악하듯 우는
매미 소리가 귀를 긁어댄다. 방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교실에는 지루한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내성적으로 보이는 전학생은
분위기를 전혀 바꾸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뒤통수와 하품하는 얼굴들이 보였다. 정신이 붙어 있는 다른 몇몇마저 아예
참고서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또랑한 목소리임에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끈적한 공기를 뚫지 못해 내용은 매미 소리에 파묻혀버렸다.
제대로 고개를 들지 않아 얼굴 위로 어릿한 그림자가 졌다. 선이 또렷하고 고와서 굳이 따지자면 미남 축에 드는 얼굴이었다.
여학생들이 이 교실 안에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관심을 끌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남녀 분반이어서 그 잘난 외모도 별다른 관심거리는
되지 못했다. 잘 들리지도 않는 자기소개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담임은 유일하게 비어있는 석율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석율에게
그래와 함께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귀찮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그새 흘린 땀에 피부가 끈적거렸다.
나가는 김에 좀 씻어야겠다, 생각했다. 조회 중인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무거운 공기 안에서 발소리가 낮게 울렸다. 장그래는
발소리마저 제대로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말을 걸지 않았더니 그 쪽에서도 걸어오지 않는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것은 석율
쪽이었다.
"야."
"……."
대답은 없었지만, 깊게 잠긴 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이쪽을 응시한다.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주친 눈동자는 말갛고
무거운 검정이었다.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작은 얼굴 위로 묘한 음영이 졌다. 먼저 불러 놓고 잠시 말문이 막혀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멈춰선 채로 그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석율은
잠깐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한석율이야. 만나서 반갑다."
"……장그래라고 해."
"알아, 아까 자기소개 했잖아. 이름 특이하네. 장예스? 그래그래 장그래?"
"……."
말소리가 작은 것 치고는 어미가 똑 부러진다. 씩 웃으며 던진 말장난에, 반듯하던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가, 그래, 하고
말았다. 마주 내밀다 말고 허공에서 머뭇거리며 멈추어 있던 하얀 손을 확 잡았다. 아직 솜털이 살아 있는 작은 손은 말랑했고, 제
손바닥의 반절이나 될까 싶었다. 섬세하게 뻗은 손가락과 손바닥 안쪽 여기저기에 미묘한 굳은살들이 느껴졌다. 그 손을 잡아끌었다.
야, 더운데 좀 씻자. 어차피 화장실은 창고로 가는 길목이었다.
#2. 고백하는 한석율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였다. 버석버석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피고름이 새어날 것 같았다. 어깨를 잡은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떨쳐내지 못했다. 석율은 그를 놓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잡아당겨 와락 끌어안지도
못하고, 그저 떨면서 붙들고 있기만 했다. 그것이 힘에 겹고 숨이 막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는 사랑이 달콤하다던데, 누군가는 사랑이 행복하다던데, 그런데 그것은 저에게는
언제고 무거운 짐이었고 날이 선 비수였다. 그 감정은 항상 자신을 끊임없이 추락하게 했고, 또 갈갈이 찢어지게 만들었다.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 탓에 눈 앞이 먹먹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저의 품에 잡혀 있을 뿐인 그래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보고싶으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토해내듯 말할때마다 목에서 피비린내가 울컥이며
올라와 숨이 막혔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응? 니가 자꾸 이러면 헷갈린단 말야……. 오라는 것처럼 쳐다봐서 다가서면 밀어내고, 싫어하는 것 같아서
가려고 하면 다시 붙잡고. 나 진짜 미칠 것 같다, 너 때문에……, 미쳐 버리겠다 장그래. 지금도 너 존나 만지고 싶은데 더이상
손도 못 대겠어. 아직도 니가 너무 멀다. 숨이 막히게 멀어. 너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해 되게
말 좀 해봐, 나 그냥…그냥 너 보면 안되냐? 니 손 잡으면 안되냐? 너 안으면 안되냐? 그냥 너 만지고 너랑 키스하고, 씨발,
섹스도 하고…그러면 안되냐? 나 그냥…"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던 그가 숨을 골랐다. 한꺼번에 뱉어내고서 숨이 막혔는지 한참 밭은숨을 몰아쉬고서, 마침내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냥 너 좋아하면 안 되냐?"
#3.기억의서랍 퇴고하면서 잘린 글
왜 닿는 걸 싫어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 그 다음 주 석율의 차에 올랐을 때였다.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담백했다. 말투만 들어서야 남의 일을 묻는다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게, 글쎄. 그래는 이마를 긁는 석율의 콧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매사 당당하고 유쾌하며 제 페이스를 놓치는 일이 드문 사람이 저를 앞에만 두면 긴장하거나 말이 꼬이는 것이 모두 제 탓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의 난처한 얼굴을 마주하면 미안한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곤 했으나, 도리어 어찌 대해야 할 지 몰라
나가는 말이며 태도는 더욱 뻣뻣해지고는 했다. 이번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아서 그는 질문을 뱉자마자 곧장 후회했다. 이래서야,
따지고 몰아세우는 모양새다.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닌데. 오래 생각하고 고민하다 물어본 것이 오히려 꽁한 감정을 쌓아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아쥐어 깍지 낀 손가락을 비비며 눈치를 살폈다. 석율은 눈과 눈 사이를 손끝으로 누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생각에 잠겨있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털어놓는다. 장그래씨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는데. 그는 안영이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검색해 알아본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자신이 아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던졌던 질문에 장그래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장 걱정했던 부분에 대해 물었다. 사람은,
사람도 읽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건드리면. 꿀꺽 침을 삼키고 쳐다보는 그에게, 장그래는 잠깐 눈을 깜박이더니, 아뇨,
한석율 씨 생각은 못 읽습니다, 대답했다. 석율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보였다.
"이렇게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하네요."
"그럼 밥 살래요?"
"예?"
"밥 사요. 그래씨 좋아하는 걸로."
"아, 그게…….
"뭐야~. 안 돼요? 야박하긴."
"사실은 제가 아는 음식점이 없어서……."
끼익, 석율이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아, 달리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를 멈춰섰다. 두 사람의 몸이 앞뒤로 휘청거렸다.
장그래씨 가게 한 지 오년은 됐다고 들었는데? 진짜? 진짜로 하나도 몰라요? 에이……. 그의 미소에는 놀란 기색이 여과 없이 묻어
있었다. 그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식당처럼 익명의 사람들이 수없이 오간 곳은 질색이었다. 그런 공간에서는, 좀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카페도 석율의 공간이 아니었으면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배달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물건이 아닌 이상 뭘 사러
나가는 일조차 거의 없는 그였다. 석율에게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기에는 번거로웠고, 어딘지 내키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상합니까?"
"아니, 거…,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단골 음식점도 없어요. 사람이 그렇게 집 안에만 있으면 병 걸려요, 병. 어째 안색이 창백하더라니……."
"무슨 상관입니까."
뾰족한 대답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원래는 뱉지 못하고 삼킬 말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뱉어 놓고는 후회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시 쪽으로 갈수록 너무 시끄러운 소리들이 가득했다. 타인의 불평불만, 지루함, 분노, 슬픔, 그리고 때로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감정조차도 그에게는 짐이 되었다. 처음부터 좋아서 틀어박힌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만 해도 내향적이기는 해도 집에
처박히기만 하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사정 같은 건 모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그의 삶에 멋대로 발을 들였다가는 훈계를
했다. 그런 것에는 넌덜머리가 나 있었다. 석율은 조용해졌다. 입을 다문 채 끈덕지게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만이 옆통수에 자꾸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으나,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아 앞만 쳐다보았다.
"그래씨."
"……."
"화 났어요?"
"……."
석율은 버석한 입술을 혀로 쓸고 마른침을 삼켰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래의 안색을 살폈다. 뾰루퉁한 얼굴을 한 채로 앞만
응시하는 옆 얼굴이 조금 붉었다. 손가락 끝으로 제 턱을 문지르고 있다가 그래 쪽으로 몸을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얌전히 무릎 위에 얹어진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제 손을 떼어내려 하는 것을 더 꽉 잡았다.
그제서야 몸을 돌려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얌전하고 순한 줄만 알았던 까맣고 동그란 눈이 저를 똑바로 쏘아보는 서슬에 그만 움찔
굳고 말았다. 그는 잘못은 빨리 인정하자는 주의였다.
"미안해요."
"……됐습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모르는 사람 사정에 이러쿵저러쿵 토 달면 안되는건데……. 내가 참견이 심했죠."
"……."
그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따금 그래를 곁눈질했으나 뭐라 말을 걸지는 않았다. 말을 꺼내기가 애매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쩝, 입맛을 다셨다가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되레 당황하고 말았다. 음악을 틀려고 했는데 시디가 모차르트
뿐이었다. 아, 미치겠네. 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어색한 침묵 만큼 싫어하는 게 없는데. 극단적으로 말이 적은 그래와 있다
보면 자꾸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혼자 말을 하게 되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들이 문제였다. 왜 이리
쩔쩔 맨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 때에도 이렇게 힘들어해 본 일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차를 세웠다.
"장그래씨, 아직도 화 많이 났어요?"
"별로, 아닙니다."
"화 났는데. 완전 화 난 것 같은데? 지금 말투 되게 삐친 여고생 같았다구요."
"……."
"여고생이라고 해서 또 화났어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꽁해가지고…….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나 적반하장인가? 근데 지금
나도 좀 놀랐거든요. 사실, 아, 모르겠다. 그래씨 되게, 자기 얘기 안 하고, 또 내가 묻는 말은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잖아요. 나
부담스러워요? 그럼 거절해도 괜찮아요. 그래씨가 수락한 거였잖아, 기억 안 나요? 지금 나 일방통행 하는 거예요?"
"……그게."
"미안해요. 대답 안 해도 돼요. 후…… 내가 혼자 신나있었나보네."
"아닙니다. 미안해요."
"어떻게 해야 미안하단 말 말고 다른 말도 들을 수 있나?"
"……."
#4.untitled 빠진 원고
장
그래는 한숨을 쉬었다. 석율은 허리까지 숙인 채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주눅 든 사람처럼 몸을 뒤로 젖혀 뺐다. 술에
취한 눈은 평소보다 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 괜히 심장이 더 뛰게 만들었다. 석율로부터 고백을 받은 것은 그가 인트라넷에
글을 올린 날 새벽이었다. 익명게시판의 글을 다 읽고 코를 훌쩍이며 탄 엘리베이터에 석율이 타고 있었다. 장그래, 나 술 한
방울도 안 마셨거든. 나 진짜 진지한데 지금 아니면 말 못 할 거 같애. 나 장그래가 너무 좋아. 좋아서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더한 것도 하고 싶어. 네가 없는 회사 생각하면 나… 숨이 막혀. 그도 울었는지, 목소리가 조금 꺼슬했다. 단숨에 쏟아놓는
말들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아직도 코끝이 매웠고, 시야는 자꾸 부옇게 일어났다.
“좋아해.”
“…….”
“우리 사귈래, 장그래?”
대
답을 하기에도 숨이 벅차, 그냥 다가가선 끌어안았다. 머리카락과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거 오케이야?
오케이한 거지 그래야? 몇 번이고 되묻는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겨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고, 말을
하기에는 목이 메어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석율이 제 어깨를 다시 잡아 마주 보았을 때에야 거푸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좋아합니다. 웃었는지 찡그렸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려서 저도 석율만큼이나 많이 떨었음을 알았다.
#5. 빨래하는 장그래
율아.
이따금 장그래가 저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석율은 온 몸이 근지러웠다. 율아, 혀를 굴리는 소리에 그의 가슴은 쉽게 뻐근해졌다. 장그래는 반바지를 걷어올린 채 이불을 밟아 빨고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 밑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하얗다. 마른 침이 한 번, 두 번,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리 와서 세제 좀 뿌려 줘, 율아. 세 번째로 부르는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뚜껑을 열어 그 단내 나는 액채를 그래의 발치에 쏟아놓았다. 코 끝이 근질거려 손으로 쓱 문질렀다. 흰 거품이 피어올라 마르고 흰 다리 위로 튀었다. 작년부터 자라지 않은 그래의 키는 석율과 비슷했다. 형 그거 알아? 석율은 내뱉지도 못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짜맞추고 있었다. 나 어제 형 생각하면서 딸딸이 쳤어. 형이랑 떡 치는 생각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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