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용으로 다듬을 예정인 글입니다.
프리퀄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해주세요...
장그래의 어머니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두 번 재혼했고 두 번째
재혼에서 장그래에게는 성이 다른 남동생이 생겼다. 결혼을 하고 보니 새아버지에게는 빚이 산더미였고, 그 빚을 갚다 지친 어머니는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출한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도망다니기 바빴고, 빚쟁이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 막 고등학생이 된 장그래는 야간자습도 빠지고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으나 원금은 커녕 이자가 늘지 않게 막는 데
급급했고 그렇게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새아버지는 거짓말처럼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부유했던 그녀는 흔쾌히
새아버지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나 불우한 두 소년과 사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녀에게는 딱 석율 또래의 딸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형제만이 남았다. 장그래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어차피 3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그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 밤이 저물어야 돌아왔다. 석율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부러 늦은 시간까지 야자를 하고 돌아오면 장그래는 집안일을 하고 있거나, 잠에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책을
읽고 있었다. 늘 그에게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목에 낀 가시처럼 호흡 끝에 매달려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말답게 뱉어낼 수
없었다. 석율은 장그래 앞에서 항상 값진 도자기를 깬 어린 아이처럼 죄스러웠다. 죄책감의 무게추는 해가 갈수록 묵직해져 그의
사춘기는 무척 고요하게 흘러갔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고요할 줄만 알았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 몽정을 한 날 밤, 석율은 울었다. 꿈에는 장그래가 나왔다. 속옷을 빨며 어이가 없고 서러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두
소년이 살을 부대껴 온 단칸방은 너무 좁아서 숨소리도 서로에게 들릴 지경이라 방에서 울 수도 없었다. 이른 새벽에 아무도 없는
공원까지 걸으며 청승을 떨다 집에 돌아갔다. 그 날 따라 힘들었는지 장그래가 죽은 듯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꿈은 반복되었고 반복될수록 선명해져 석율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끝없는 갈증과 답답함을 느꼈다. 장그래의 왜소하고 축 처진
그림자를 애써 피해다녔다. 자습을 빠지기 시작했고, 마음대로 머리를 길렀다. 그는 한없이 가벼워졌고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가 늘었고 여자친구가 생겼다. 연애는 항상 일 개월도 넘기지 못했지만 금방 새 여자를 사귀었다. 그는 그래가 잠들
시간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고 그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장그래는 침묵했다. 그는 석율에게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새카만 눈에는 깊이가 없어서, 석율은 금방이라도 곤두박질 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수시로 온갖 감정이 닥쳐들어 숨통을
조였다. 그래도 그 집을 떠나려 하지 못한 것은, 그 작은 단칸방과 이제는 저보다 더 키가 작은 장그래가 그의 작은 세계에 남겨진
전부였던 까닭이었다.
"석율아."
석율은 손가락끼리 마주치는 장난질을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상담실의 조명은 우중충했고, 공기는 탁했다. 가끔 교사들이
여기서 몰래 담배를 피운다고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담임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남자였고, 꽤 골초인지 그 나이에
이가 누랬다. 석율은 그의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표정을 살피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다. 그는 구부정하던 허리를 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비로소 그의 표정이 좀 풀어진다. 대학에 안 간다고? 예.
담임이 냉수를 들이킨다. 석율은 습관처럼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사뭇 반성하는 소년처럼 시선을 내리깔아, 담임의 옷깃 부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흠흠, 담임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너 성실하고, 공부도 곧잘 했는데 대학 안 가기는 아깝지 않니. 선생님은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구나. 부모님이 정말 동의하신 거니?"
"……."
진로희망조사서.
담임이 탁자 위에 놓인 그것을 집어들었다. 석율은 입을 다물었다. 버석거리는 갱지를 쏘아본다. 입 안이 온통 꺼슬거렸다. 부모님
서명이 필요한 서류를 받아들 때마다 뺨을 맞은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서명 같은 걸 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진로 같은 걸
같이 고민해 줄 사람 따위, 더더욱 없다. 그 작은 종이는 그런 것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불쾌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학 같은 건 꿈도 못 꿀 처지였고 그냥 어디든 취업이나 하겠노라고 적어 냈다가 담임에게 불려나가 긴긴 잔소리를
들었다. 석율아. 사춘기 소년의 하찮은 고민쯤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시 제대로 써 오렴. 어차피 선생들은
자기 학교에서 좋은 대학에 몇이나 보냈나, 그런 것이나 신경 쓰고 앉은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요즘 어울리는 친구들은, 음,
선생님이 볼 때는, 너한테 도움이 될 친구는 아닌 것 같구나.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상담은 싱겁게 끝났고, 손에는 새 종이가
쥐여졌다. 그것을 성의 없이 구겨서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답답한 기분에 손톱을 깨물었다. 돌아가는 길에, 담임이 말한 '요즘
어울리는 친구들'을 만났다. 녀석들은 뚫어 놓은 술집이 있다며 석율을 꼬셨다. 도통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못 이기는 척 그들을
따라갔다. 술은 쓰고 독했다. 그리고 술에 절어 살던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마시면서 웃고 떠들수록 기분은 더러워졌다. 붙잡는
친구들에게 대충 아무 변명이나 주워섬기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발에 채이는 것들을 걷어찼다.
계속해서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씻고 나왔을 때, 그래가 그를 불렀다. 집어던졌던 책가방이 단정하게 책상 위에 정돈되어 있었다.
석율은 머뭇거리다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아직 몸에서 술 냄새가 날까,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왔을 때에는 분명 술
냄새가 났을 것이다. 엇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석율이 술을 먹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래는 그것에 대해서도 토를 단
적이 없었다. 그래는 평소와 같은 말간 눈으로 석율을 응시했고, 석율은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곁눈질로 그의 얼굴만 살폈다.
장그래는 표정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바둑 기사나 도박사, 뭐 그런 걸 했으면 아마 천직이었을 것이다. 석율에게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기술이 늘은 것은 그만큼 그래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는 표정이 없었지만, 대충 화 난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담임이 전화했었구나, 퍼뜩 그런 생각이 들어, 신경질이 났다. 담임은 석율이 부모와 살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장그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의 대화한 일이 없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석율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대학 안 갈 거야?"
"응."
"너희 아버지께는……."
"…연락 하기 싫어."
"그래."
그래는 여전히 별 말이 없었다. 형. 석율은 눈치를 보다 다시 그를 불렀다. 목이 좀 타는 것도 같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문다. 자신의 입술은 그래의 도톰한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 사실상 남남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 입술을 깨물면, 그런
생각이 얼핏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몰려 뜨거웠다. 바싹 채워 올린 셔츠 단추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의식적으로 고개를 몇 번
움직였다. 그래가 눈을 깜박였다. 그의 눈은 늘 새카맣고, 깊이가 없어 더 아득했다. 그 눈동자가 묵묵히 석율을 응시한다. 말 해
보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석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저에게만 유독 크게 들렸다.
"형은, 괜찮아?"
"뭐가?"
"나 대학 안 가는 거."
"네가 결정한 거라면 난 상관없어."
"형은."
…그리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갑자기 말문이 막혀, 그냥 입을 다물고 웃었다. 장그래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다. 작은
어깨가 언제나처럼 축 처져 있었다. 그가 자라지 못한 것은 그의 어깨에 늘 지워졌던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그 짐을 늘리지 않으려 조용히 지냈다. 요즘은 그 짐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부분이 견딜 수 없이 싫어, 그가 자신이라는
짐이라도 내려놓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것이 석율을 괴롭혔다. 넥타이를 풀어 느슨하게
하고, 교복 단추를 하나 끌렀다. 아까보다 숨통이 트였지만 호흡은 더 가빠져 있었다.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래를 응시했다.
스스로 듣기에도 한심한, 울 것 같은 목소리.
"형은 왜 나랑 같이 살아? 이제 우리는."
"가족이니까."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석율을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술기운은 감정의 울타리를 낮추었고, 석율은 그것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 오래 묵혀 두었던 감정이 쏟아져 나와 머리가 아팠다. 가족! 그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그래가 움찔했다. 비릿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속에서 끓어올라 넘치려는 것을 억지로 삼키고서 뱉어낸 목소리는 으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왜 가족이야."
"……."
"나는, 형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해."
눈물 때문에 앞이 흐렸다. 장그래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것은 자신인지도 몰랐다. 발밑이 출렁거린다. 그는 앉아
있던 그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단칸방은 조금만 움직여도 벽에 닿을 만큼 좁아서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불시에 당한 일에 장그래는
저항도 하지 못했다. 왜소한 그 몸은 쉽게 자신의 품 안에 갇혔고, 당황해 뻗은 가는 손목은 단숨에 벽에 고정되었다. 장그래의
손은 작아서, 더듬더듬 손바닥을 겹쳐 잡자 석율의 손 안에 모두 들어왔다. 그 손끝에 닿는 굳은살이 서러워 맥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열이 올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갈 기세로 뛰었다. 머리 안에서까지 맥박이 쿵쾅거렸다.
"가족끼리는…이러지 않잖아."
이런 생각 품지 않잖아.
가까스로 말을 토해냈다. 그래의 입술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얼마나 저 입술을 물어뜯고 싶어해 왔는지, 장그래는 모를 것이다.
평소에도 불그스름하고, 수줍어하거나 화가 나면 더 붉어지는 그 입술이, 어느 때보다도 더 새빨개지도록 만들고 싶은 욕망이 언제나
뱃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곤 했다. 석율은 장그래를 생각하며 처음 자위했던 날을 지금도 기억했다. 학교 화장실 제일 깊은 칸에
숨어서, 그 입으로 봉사받는 상상을 하며 제 성기를 문질렀다. 여름에 접어들기 시작한 날씨는 조금 습했고 화장실은 조명이 낡아
어둑했다. 정액이 묻은 손을 내려다 보는 기분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장그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귀 뒤가 홧홧하니 달아올라, 결국 고개를 떨궜다. 온 몸이 떨려서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바닥이
사라져서 떨어져 버렸으면 싶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석율에게 잡혀 있던 그래의 손이 석율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한
팔이 등을 보듬어 안았다. 그래의 품은 너무 작고 좁아서 석율을 제대로 끌어안아 줄 수도 없었다. 이렇게 컸구나, 네가. 여전히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래서 석율의 기분은 더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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