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율그래]술 한 잔
- TEXT/미생
- 2014. 12. 7. 21:59
나도 그 자식처럼 되면 어떡해.
그래는 복기하던 손을 멈췄다. 하루종일 양말 장사를 한다고 까맣게 잊고 있던 아침 나절의 일을 기억해 낸 것은 그 날의 복기를 거의 마쳐가던 시점이었다. 바둑돌을 쥔 손이 허공을 돌다, 멈춘다. 가만히 그것을 손바닥 안으로 모아 쥐었다. 사실 제가 복기할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석율의 바둑이고, 자신은 훈수를 둘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훈수마저도 한석율에게는 썩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기풍은, 말하자면 자신과는 상극이 아닌가.
연구생 시절 만난 이들 중에 그런 기풍을 지닌 녀석들이 있었다. 미리 주어진 계보나 틀을 거부하고 파격적인 승부를 보는 이들. 정석에 목 매다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기풍이었다. 고수들의 기보에 집착하는 자신 같은 연구생이 주로 틀에 박힌 바둑, 개성이 없는 바둑을 두어서 문제가 된다면, 이들의 바둑은 안정감이 없고, 때로 지나치게 난폭했다. 이런 이들의 미래는 보통 두 가지다. 그 빛나는 천재성으로 바둑계에 돌풍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마른 침을 삼킨다. 아니, 여기는 바둑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한석율이다. 그러니까 아마, 별 일 없을 것이다. 잡기들을 치우고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천장의 꺼진 등이 괜히 선득해, 눈을 꽉 감았다. 그의 껍데기는 견고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일로 깨어지진 않을 거다. 괜찮을 거다. 괜찮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 끝에 까무룩 잠에 떨어졌다.
"여어, 장그래."
"……? 누구…."
"야, 이거 서운한데. 못 알아 보는 거야?"
다음날 아침 출근길, 회사 로비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채 뒤를 돌아본 장그래는 눈을 깜박였다. 그 잔잔하던 눈빛에 놀람과 경악이 어리는 데는 채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 동안 상대는 올렸던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머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서류가방을 쥔 손가락이 꼼지락댄다. 그래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이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한석율씨?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엘리베이터까지 걷는 짧은 시간 동안 그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그의 눈치만을 살폈고 석율도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머릿속에 얼핏 떠올랐던 생각이 다시금 어지럽게 피어오른다. 파격적인 승부사들. 자신의 색이 너무 강해, 존재만으로 돌풍같던 존재들. 그들은 그 빛나는 천재성으로 바둑계에 돌풍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한석율씨, 저기."
"응?"
"머리가……."
"……하하, 그만 봐. 머리 자른 게 그렇게 어색해?"
…아니면 그 첨예하던 부분들이 모두 부서지고 꺾여 만신창이가 되어 자신의 바둑을 잃어버리거나.
머리를 잘랐다. 한석율이. 세팅에만 20분은 걸린다던 앞머리도 없앴다. 민무늬의 깔끔한 셔츠에 얌전한 무늬가 들어간 얌전한 색의 넥타이를 맸다. 쥐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반듯하게 잘생겼으나 그 모든 것이 남의 옷을 입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한참을 바라보다, 돌연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 사람이 한석율이구나. 개벽이가 아닌, 한석율. 언제고 그 단단한 가면 너머의 민낯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 하지만 이렇게는. 이런 식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조금 더 평범한 방식으로. 조금 더 그가 상처입지 않을 방식으로…. 손끝이 식는 기분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한석율은 장그래의 어깨에 손을 얹지도, 그 작은 손목을 잡아채지도 않고, 그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처연하기까지 한 옆얼굴이 마치 손톱을 잘못 자르는 바람에 드러나 버린 속살 같아서 심장이 아렸다. 여자 흉내를 내며 넘기던 머리카락이 잘려 사라진 만큼 석율의 얼굴은 지쳐 보였고 그래는 괜시리 제 뒤통수가 시려옴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15층에 도착하고도, 그래는 잠깐 뜸을 들였다. 그래씨 안 내려? 그제야 톡톡 팔을 건드리는 손을, 기다렸다는 듯 붙잡는다. 그 단단한 손이 처음으로 제 손보다 더 찼다. 석율의 몸이 조금 굳어졌다. 석율씨, 저기. 무슨 얼굴일지 몰라서, 그 낯선 표정을 마주하기가 겁나서 그래는 차라리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한석율씨. 부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두 뺨에 열이 몰려 뜨거웠다.
"끝나고 술 한 잔 하죠."
간신히 뱉어낸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석율은 그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난 기분이 들어 휘청였다. 그래. 석율이 간신히 쉰 목소리를 뱉었다. 억지로 지어 보이는 미소에 마음이 시리다. 그래, 장그래. 그러자. 우리 술 한잔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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