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율그래] 기억의서랍 02 - 샘플
- TEXT/미생
- 2014. 12. 28. 00:59
- Posted by 유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센티넬버스 설정 일부 차용한 AU. 싸이코매트리 장그래와 가이드 한석율이 나옵니다.
퇴고 하기 너무 쟈증나서..그냥 올립니다..흡...저는..슬애기...
이 글은 어느 넬빠수니의 넬헌정연재물......ㅎ..농담이에여 그런ㄱ건 아니구 그냥 어쩌다보니 지금 넬에 꽂혔네요
"많이 바빴나 봐요?"
왜 안 왔냐느니 하는 말 대신 그가 건넨 인샀말은 그랬다. 그리 바쁠 것도 없는 골동품점의 사정을 알 만도 하건만 따져 묻지 않는 것은 늘상 배려를 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석율의 천성이었다. 무슨 커피 좋아하시는 지 몰라서, 일단 무난하게 라떼로 내려왔어요. 아, 정말, 그래씨니까 서비스 해 드리는 겁니다. 오면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는데. 아, 커피는 마시죠?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서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래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 손에는 보온병을, 한 손에는 시럽을 들고 흔들며 활짝 웃는다. 쌍커풀이 짙은 눈이 둥글게 접히고 보조개와 눈가 주름이 잔뜩 잡히는, 바라보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질 듯한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는 곧이어 새 것으로 보이는 도트무늬 머그잔을 그래의 앞에 턱 올려놓고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따라냈다.
"짠! 이 머그잔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카페 개점 기념으로 딱 열 개만 만들어서 친척집에 돌리고 남은 건데, 특!별!히! 드릴게요. 아니아니, 사양하지 말아요. 하하하핫. 아, 그나저나 내가 또 라떼아트하면 완전 장인인데. 커피 거품으로 못 그리는 게 없거든요~. 이거 장그래씨가 와야지 보여드리는데 말예요. 시럽?"
"아, 아닙니다. 시럽은 괜찮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제 드셔 보시라. 사양 말고 쭉쭉 마셔요. 쭉쭉~."
"……감사합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를 새도 없이 말을 늘어놓았고, 말 중간중간마다 혀 차는 소리를 섞곤 했다. 전에 찾아왔던 때의 행동은 얌전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아직 더운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약간 과장된 친절이 밴 동작과 마치 술이라도 권하는 듯한 멘트와 함께 내밀어 보였다. 군말도 군동작도 많은 사람이구나, 그래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개업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머그잔에는 개점 당시 석율의 긴장감과 설렘의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마시기 딱 알맞은 온도의 커피를 두어 모금 천천히 들이켰다. 제 커피가 맛있다던 석율의 말은 공수표가 아니었다. 커피 맛은 잘 모르는 그래의 입맛에도 맛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옅은 거품과 섞인 진한 커피향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래는 맛있다고 말하는 것도 잊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석율은 카운터에 한 팔을 걸친 채 비스듬히 서서 그래가 커피를 마시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감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맛있네요."
"그쵸? 갓 내렸을 땐 더 끝내주니까 다음엔 꼭 와요. 좀 더 마실래요?"
그린 듯한 친절한 미소로, 그가 물었다. 굳이 그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기 전에, 그래는 가게 안에서 간이 의자를 하나 석율의 앞에 가져다 놓고, 찬장에서 과자를 꺼내어 내놓았다. 사양 않고 자리에 앉은 석율은 다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의 공백도 견디기 싫어하는 성격이구나, 싶었다. 그의 모든 발화에는 온갖 소소하거나 그렇지 않은 동작들이 섞여 있었다. 그는 지난번에 가게에서 사 간 몇몇 골동품들 중 몇 개를 카페에 진열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텄다. 이야기 하는 동안 두 손이 잠시도 쉬지를 않아, 그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퍽 재미있었다.
"그래씨 가게에서 사 간 물건 말예요. 그거 완전 대박났다니까요. 물건 보시는 안목이 있으셔, 장그래 씨. 난 골동품이라고 하면 퀴퀴하고 곰팡내 나고, 뭐 그런 걸 생각했는데, 사실 여기 들어와서 진짜 놀랐어요. 웬걸, 가게 자체가 신비롭다고 해야 하나, 고풍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 왜, 그, 뭐야. 맞다. 앤티크. 크~ 왜 앤티크 앤티크 하는지 알겠더라니까. 여기 무슨 보물 창고 같아요. 막 신기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잠잘 것 같은 다락방 있잖아요. 동화책에 나오는."
"…과한 칭찬입니다."
"과하긴요, 진심인데."
그래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보다 솔직한 얼굴빛이 그의 쑥쓰러움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주스라도 좀, 드시겠어요? 갑작스레 달려든 갈증 때문에 한 말이었으나 석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나도 떠들었더니 목이 좀 타네요. 그가 고개를 한 번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활짝 웃는 얼굴.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 만으로 심장 한 구석이 간지러워지는 미소였다. 아, 혹시 담배 한 대 태우고 와도 될까요? 그래가 내 온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그가 검지와 중지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래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두 사람 간의 대화-거의 석율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형국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했으므로-는 잠시 중단되었다. 석율은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듯한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래는 가만히 그 독특한 뒤통수가 사라진 문을 응시하며, 정말 특이하고 신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지닌 물건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한석율의 모습과, 눈 앞의 한석율은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보잘 것 없는 능력 탓에 원치 않는 타인의 내면을 수도 없이 훔쳐 볼 수 밖에 없었으나 석율처럼 조용한 내면을 지닌 사람은 몹시 드물었다. 그래가 석율의 물건과 접촉함으로써 받았던 이미지들에 비추어 볼 때, 한석율은 바둑만이 소일거리인 길 건너편 복덕방 아저씨보다도, 그래가 자주 찾는 골목 어귀의 서점 사장님보다도, 아니 사실 그가 알고 지낸 거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훨씬 안정되고 고요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석율은 그가 알고 지낸 어떤 사람보다도 말이 많았고 톡톡 튀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그래는 사람을 대할 때에 눈 앞의 사람보다도 그와의 접촉에서 의도치 않게 읽어들이는 타인의 내면으로부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유별날 만큼 시끄러운데도 불구하고 석율과의 대화가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오히려 편한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 앉아 있자니 허리가 슬슬 아픈 것 같아서 그는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반에 놓인 물건들이 제각기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처음 듣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울지 모르는 이야기도 많았으나, 그 이야기들을 매일 들어온 그래에게는 자장가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그래는 이제 익숙하게 흘려 들을 수 있었다.
"장그래씨."
문 열리는 소리, 다급한 발소리가 연달아 나는가 싶더니 단단한 손이 갑자기 어깨에 닿는다. 또 거짓말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던 속삭임들이 뚝 끊어졌다. 석율은 그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엄습한 고요에 굳어진 사이에 그래의 손목을 낚아챈 석율이 그를 가게 밖으로 잡아끌었다. 한석율씨? 이름을 불러 그를 세우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거친 힘으로 닫힌 유리문은 저 혼자 몇 번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문에 걸린 작은 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석율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둥글고 큰 눈동자에 비친 그래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얼이 빠진 사람 같았다.
"…뭡니까?"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게 밖의 세상이 너무 고요해서, 장그래는 눈만 깜박였다. 멀리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자신의 귀가 먼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석율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훑는 혀의 움직임이 신경질적이다. 여전히 그래의 손목은 놓지 않은 채로(아니 정확히는,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그가 왼손을 입가로 가져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손톱 씹는 버릇은 안 좋은데. 그래는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석율의 팬던트에서 읽었던 기억 중에는 손톱을 씹는 어린 석율이 있었다. 그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기, 장그래씨."
"예?"
"오늘 가게 안 바쁘면, 내 카페 보여줄 테니 지금 나랑 안 갈래요?"
석율의 손가락이 그래의 손목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래는 석율에게 잡힌 손목을 한 번 내려다 보고, 다시 석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정말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걸까. 꼭 자신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쉴 새없이 흔들리며 자신을 곁눈질하는 그 긴장한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석율이 자신의 안내자일지 모른다는 심증은 이제 반쯤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직접적인 접촉 없이 그의 소유물로부터만 얻어낼 수 있는 석율에 대한 이미지들은 매우 피상적이었고, 그래서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오히려 더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장그래로서는 몹시 드문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뇨, 아닙니다."
석율이 민망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떨궜다. 뒤늦게 저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며 들이닥친 소음에, 그래는 잠깐 머릿속이 멍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어색한 기류가 두 사람의 발치에 쿵 내려앉았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석율은 쉽게 다음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였고, 본디그리 대화에 재주 있는 편이 아닌 그래 역시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멀찍이서 우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웠고, 한여름의 공기는 끈적이는 온도로 맨 살 위에 들러붙었다. 더운데, 일단 다시 들어갈까요? 그래가 말했고, 석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선선한 공기 덕인지 조금은 숨이 트였다. 휴,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니 석율 역시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아까 왜 갑자기 절 데리고 나가신 겁니까? …카페로 납치라도 하시려던 건가요?"
"……아."
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시선을 내리깐 채 잠깐 침묵하다가,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곤 고개를 들었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를 상기시켰다. 그 미소가 잘 만들어진 가면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니에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서. 엉뚱한? 그 말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석율은 얼른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가게에 음악 같은 건 안 트시나 봐요. 뭐 조용한 것도 나름대로 어울리지만…… 그는 선반 가득 진열된 도자기와 공예품들을 느릿한 걸음걸이로 돌아보았다. 온통 낡은 냄새로 가득한 물건들은, 늘 닦아놓은 덕분에 먼지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글쎄요. 그래는 선반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늘씬한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대꾸했다.
"…이미 많이 시끄러워서."
"예?"
"……아닙니다."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가 곧 후회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밝히는 것은 항상 좋은 선택은 못 되었다. 석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님 지금 나더러 시끄럽다고 한 겁니까? 그가 눈살을 찡그리며 입술을 비죽 내민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시선이 그래를 응시한다. 아, 그렇다기 보단……. 서둘러 말을 고치려는 그래를 보고, 석율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입니다, 농담. 양 손을 들어올리는 포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귀 뒤가 화끈거렸다. 저 사람처럼 말 돌리는 재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수습하려고 머리를 굴리다 맥이 탁 풀려버렸다. 석율은 재미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짝다리를 짓고 서 있었다.
"여기가 내가 태어나 와 본 곳 중에 제일 조용한 것 같은데, 거 참."
"별로인가요?"
"아뇨, 좋아요."
"……."
"귀 또 빨개지셨네."
그가 짖궂은 목소리로 웃었다. 또 갈증이 목청을 타고 올라와, 꿀꺽, 마른 숨을 삼켰다. 석율은 다시 가게의 물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경쾌한 걸음걸이에 콧노래가 섞여들었다. 그 둥그런 뒤통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전혀 없어 답답했다. 찡그리지 말아요. 불쑥,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석율이 그의 코앞에 다가와 섰다. 긴 손가락이 미간을 툭 짚었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제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쾅쾅 울려댔다. 머리가 아팠다. 석율이 눈을 마주쳐 오며 씩 웃었다. 주름 생겨요. 그 웃음이 유독 크게 들린 것은 사위가 너무 고요한 탓일 것이다.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가 감각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석율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퉁명스레 나간 대답에도 석율은 웃기만 했다. 이상할 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꽁꽁 감추고 있는 그 미소가 몹시 거슬렸다. 그래서 결국 그 궁금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좋습니다. 가 보죠."
"예?"
"석율 씨 카페 말입니다. 사실 저도 궁금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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