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렸다. 금요일 회식자리부터 목청이 쎄하더라니, 아침에는 제대로 눈이 떠지지도 않는다. 지금 몇 시지, 더듬더듬 휴대폰을 집었다가 토요일인 것을 깨닫고 안도한다. 열에 들뜬 몸이 후들후들 떨려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좀 더 잘 생각으로 다시 눈을 감았지만 몸이 너무 쑤셨고 결정적으로 배가 고파서, 결국 이불 밖으로 기다시피 나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무거운 손발 때문에 몸이 축 처졌다. 석율은 한숨을 쉬었다. 복층 아래의 부엌이 이렇게 멀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아, 씨.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 주질 않았다. 배달음식 시켜먹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목이 너무 부어서 제대로 삼킬 자신도 없었다. 대충 손으로 땀을 훔쳤다. 죽, 죽을 어떻게 끓였더라? 석율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부엌 근처에도 가 본 일이 없었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도 기껏해야 라면이나 끓여 먹고, 국이나 데워 먹고, 계란이나 구워서 집에서 싸준 반찬에 밥을 먹는 정도였다. 죽 사러 나가기도 벅찰 만큼 아프기는 처음이라 더 머리가 아팠다. 그는 더듬더듬 휴대전화를 꺼냈다. 집, 에 전화할까, 하고 어머니 번호를 찍었다가 지운다. 안 그래도 아들이 나와 산 이후로 걱정만 늘어난 어머니였다. 감기 같은 시시껄렁한 걸로 전화하기는 싫었다. 다시 전화번호부를 살핀다. 연락할 곳이 마땅치 않다. 서울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회사 동료 정도…. 그리고 ㄱㄴㄷ 순으로 훑어내려가던 손가락이 장그래, 세 글자에서 멈춘다.
아… 아니야, 이건 아니지. 남자 체면이 있지 와서 돌봐 달라고 징징대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아쉽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무거운 몸을 움직여 계단을 내려갔다. 어떤 멍청한 놈이 복층 오피스텔을 계약했냐고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하다가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 그만두었다. 죽 끓이는 법, 검색해서 나온 것 중 제일 쉬워 보이는 방법으로 해 보기로 하고, 밥솥의 밥을 꺼내 물과 함께 끓였다. 얼굴을 향해 올라오는 열기를 쐬고 있자니 금방 땀에 폭삭 젖어버렸다. 불현듯 서러움이 쏟아진다. 내 감기 죽 내가 끓인다는 게 참 그렇구나. 한기와 외로움이 으슬으슬 몸 속을 기어다녔다. 제 기침 소리가 제가 듣기에도 몹시 환자 같아 서글펐다. 물조차 쉽게 목구멍을 넘어가 주지 않았고 밥만 푹 끓인 죽은 맛이 없었다. 간신히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엄청 고된 일이라도 한 것처럼 피로가 덮쳐왔다.
또 침대까지 올라갈 엄두는 나지도 않아서 소파 위로 고꾸라졌다. 제대로 된 담요도 없어 몸이 빨리 식었다. 아, 진짜 죽겠네. 소파에 한참 웅크려 있다가, 고요한 집 안 공기를 참을 수 없어 결국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무 예능이나 틀어놓았지만 도통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새삼텅 빈 집이 넓었다. 집이 좁다고 혼자인 게 둘이 되고 하는 것도 아니건만 넓은 것을 탓했다. 그저 밤에 눈만 붙이는 공간이라기엔 집은 넓었고, 석율은 그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지 못한 채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장그래, 다시 떠오른 그 이름에 피식 웃었다. 전화해서 나 아파, 장그래. 하면 또 긴치 않은 수작질이나 한다며 퇴짜를 맞을까. 손 안에서 휴대폰을 만지작만지작, 이미 외운 그 번호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른다. 절대 아파서는 아니다. 아파서는 아니고, 그래, 집이 너무 넓어서. 그러니까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혀로 입술을 쓸었다. 이게 뭐라고 입이 마르나. 신호음이 한참 계속되다가, 달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장그래, 나 아파."
-…….
"너무 아프다 장그래……."
-약은…아니 식사는 하셨습니까?
"죽…끓여 먹었고 약은…안 먹었어……."
-…….
"…장그래 보고 싶다."
-…….
툭, 충동적으로 내던졌다. 대화에는 침묵이 길었다. 평소 석율이 떠들며 메웠던 시간만큼을 침묵이 차지하고 만다. 장그래는 늘 감정 표현이 적었고, 특히 이렇게 얼굴도 못 보고 전화 통화만 할 때면 의중 파악이 더 어려웠다. 석율은 그런 장그래를 떠 보려 부러 그 속을 살살 긁어대곤 했다. 그래서 불쑥 짜증스런 반응이 튀어나오면, 아, 이 자식도 사람이군, 하면서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장그래 뭐 해, 끊었어? 끊어지지 않은 걸 알면서 괜히 한 마디 더 하다가 기어이 기침을 쏟았다. 눈에 눈물이 맺히고 머리가 핑 돈다. 아, 오라고 했던 건 농담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기침까지 하고 말하기에도 꼴이 우습다. 장그래는 얼마간 더 침묵했고 석율도 물만 겨우 들이켰다. 공백이 너무 길다. 석율은 그렇게 비어 있는 것이 싫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그래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목에서는 피 맛이 났다.
"그냥 목소리 들을려고 전화했어. 그럼…."
-어딥니까?
"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용산구 한강로 1가 50-3 쉐리빌…이게 아니지. 장그래 이건 왜 물어봐?"
-한 시간만 기다리십시오.
"ㅇ, 어?"
전화는 끊어졌다. 석율은 통화가 끊긴 화면을 내려다 보았다. 기다리라고? 장그래가 오겠다는 건가? 늘 집에 오라고 사정사정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그가?
*
그래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장그래, 나 아파. 그렇게 말하는 음성은 평소 석율의 톤보다도 두 톤은 낮았고, 몹시 힘이 빠진 것 같았다. 그 말에 늘어져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 아파, 장그래. 밑도 끝도 없는 어리광 같은 전화에, 이건 또 뭐 하는 수인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그냥 정말 아파서 전화했다 외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항상 석율은 그랬다. 그래가 생각지도 못한 과하게 정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수들. 바둑판 위에서였다면, 너무 뻔해서 채 몇 수 두기도 전에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바둑판이 아니었고, 때로 이러한 수들도 유효했다. 장그래 보고 싶다. 그 솔직하고 담백한 한 마디에 언제나 장그래의 심장은 쉽게 주저앉고 말았다. 석율의 기침소리는 누가 들어도 감기에 된통 걸린 사람의 것이었고, 석율이 거의 말하지 않는 바람에 통화에서는 침묵이 차지한 시간이 더 길었다. 석율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 뭔가 챙겨줄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어머니께서 한창 바쁘셔서 혼자 누워 감기를 앓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그래는 차마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한참 입술만 씹다가 불쑥 내뱉듯 한 시간만 기다리라고 한 것은 반쯤 충동적이었다. 죽 재료를 챙기고 약국에 들러 약을 사서 석율의 오피스텔 현관에 섰을 때는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와, 진짜 왔네.
"문 열어주십시오."
-너 장그래 아니고… 다른 사람 아냐? 의심스러운데…. 장그래 막 이런 데… 와주고… 그럴 사람…… 아닌 줄 알았는데.
"돌아갈까요?"
-어어, 아냐아냐.
다급한 목소리에 이어, 철컥, 현관이 열렸다. 그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열린 문으로 걸어들어갔다. 다시 석율의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석율의 머리는 부스스했고 열에 들뜬 얼굴은 붉었다. 늘 또랑또랑해서 도록도록, 굴러가는 소리라도 날 것 같던 눈이 초점 없이 흐릿하다. 진짜 장그래다. 석율이 멍청한 소리를 하며 웃었다. 힘없는 목소리는 전화로 들을 때보다 더 심하게 잠겨 있었다. 감기 걸리더니 머리가 이상해지셨습니까, 한마디 하려는데, 풀썩, 뜨끈한 무게감이 어깨 위에 멋대로 주저앉았다. 석율의 이마는 타는 듯 뜨거웠고 몸은 꼭 물에 불은 솜마냥 묵직했다.
"무겁습니다, 한석율씨."
"장그래씨 몸 시원하다아…."
"……좀 비키, 십시오. 저 안 들여보내 주실 겁니까?"
힘껏 석율을 밀어내 보려 했으나 한 손에 짐까지 든 상태로 석율의 체중을 당해내기란 어림없었다. 두어 번 목덜미에 더 이마를 문지르던 석율이 그래를 안은 자세 그대로 현관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 좀, 한석율씨. 재차 짜증내는 목소리에, 겨우 아쉽다는 듯 떨어진다. 저기 소파에라도 좀 가서 앉아있으세요. 결국 퉁명스런 목소리가 나갔지만, 그래도 마냥 좋다고 웃는다. 정말 밸이 없는 건지 뭔지. 석율이 비틀거리며 소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에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오피스텔은 널찍했고, 의외로 깔끔해서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 괴팍하고 술 좋아하는 성격이라 마음대로 지저분하게 해 놓고 살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는, 석율이 대충 지어먹은 듯한 죽 맛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별다른 재료도 없이 밥으로 바로 지은 죽 같았다. 좀, 다시마라도 넣든가 하지, 하면서도 저 고열에 자기 죽 끓이며 땀 빼고 있었을 석율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짠했다. 역시 죽 재료도 챙긴 것이 정답이지 싶었다. 그는 다시 불을 올려 다진 쇠고기며 야채를 넣어 새로 죽을 끓여 놓고, 물컵과 약봉지를 들고 석율에게 다가갔다. 석율은 그 잠깐 사이 소파에 웅크린 채 졸고 있었다. 왱왱거리는 티비 소리가 시끄럽다. 한석율씨, 흔들어 깨우자 팔을 뻗으며 안으려고 드는 것을 한 번 뿌리치고 컵과 약을 디밀었다. 이거 먹으면 장그래 씨 안고 있어도 돼? 안됩니다. 아 매정하긴.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약을 입에 넣고 삼킨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그래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불시에 당한 일에 그래는 쉽사리 석율의 품 안에 갇혀버렸다.
"한석율씨 지금 뭐 하는…."
"쫌만 이러고 있자. 응? 조금만."
"……."
천상 칭얼대는 말투였으나, 귓가에서 푹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만 손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속으로 한탄하며 그래는 뿌리치려던 손을 놓고, 석율이 끌어당기는 대로 무릎 위에 앉았다. 아픈 사람에게는, 그게 누구든 참 모질어질 수가 없다. 아픈 것은 서러운 일이게 마련이고 특히 혼자 아픈 것은 더욱 그랬다. 그럼 저, 티비라도 끄면 안 되겠습니까, 시끄러워서. 한숨처럼 말했더니 의외로 쉽게, 응, 그래 장그래, 한다. 텔레비전이 꺼지자 집 안은 곧 조용해졌다. 석율의 집은 두세 명 같이 살아도 될 정도로 넓은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그래에게는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집보다도 이 곳이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익숙한 그래였지만 석율과는 이렇게 오래 침묵해 본 것이 처음이라, 오히려 그가 어색함을 느꼈다. 자는 것인지 자는 척 하는 것인지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 등 뒤의 한석율은 고요했다. 고른 숨소리며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몸을 감싼 열기 같은 것이 고스란히 피부를 타고 그래에게 스며들었다. 석율의 몸은 땀에 젖어 있었으나 의외로 불쾌하지 않아, 그래 자신도 신기했다.
*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어났을 때에는 해가 저물어 있었다. 저 발에 쥐 났습니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장그래가 귀여워서, 괜시리 한 번 세게 안아주고서야 놓아주었다. 쥐가 난 것은 정말이었는지 그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몇 걸음을 절고 혼자 스트레칭까지 했다. 귀까지 빨개진 동그마한 뒤통수 너머의 얼굴이 상상되는 것 같아 소리는 내지 않고 웃었다. 얼마 후 장그래가 새로 끓인 죽을 가져다 내밀었다. 이거 드시고 다시 약 드시고 주무세요. 죽그릇을 받아들다가 장난기가 돋아 씩 웃으며 나 떠먹여줘, 했다. 그래가 못 박힌 듯 서서 꼼짝 않고 저를 바라본다. 딱 기대한 대로의 반응이라, 그는 킬킬 웃었다. 이제 농담이라고 말해주려는 순간 갑자기 죽이 담긴 숟가락이 눈앞에 쑥 내밀어진다.
"아 하십시오."
"어?"
"안 드실 겁니까?"
이거 꿈인가. 석율은 눈만 껌벅껌벅하다가, 그래가 도로 가져가려는 것을 얼른 입에 집어넣었다. 그래는 두 말 없이 석율의 옆에 앉아, 죽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전부 떠먹여 주었다. 받아먹으면서도 얼떨떨해서, 반쯤 먹을 때까지 죽이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 새카만 눈동자만 깜박깜박, 석율의 시야에 갇혀 있었다. 절반쯤 먹은 후에는 연신 맛있다는 소리를 하다가 목소리 좀 아끼라며 빈축을 샀다. 그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참,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있을 때에는 파악하기가 쉬운데 말이야, 하는 생각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래가 주는 약을 삼키고는, 턱을 쓱 괴고 설거지 중인 자그만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복을 입은 장그래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어려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뭡니까. 다 드셨으면 환자는 이제 주무시죠."
"그래, 장그래는 집에 가고?"
"못 갑니다."
"어?"
"막차 시간 지났습니다. 석율씨 아까부터 되게 바보 같은 거 아십니까?"
어어, 그제서야 시계를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밤 열한 시 반, 주말이니까 정말로 막차가 끊어졌을 시간이다. 장그래 날 위해서 막차도 놓친 거야? 가슴 언저리가 가려워졌다. 몸만 멀쩡했다면 달려가서 와락 안고 뽀뽀 세례라도 퍼부어 주었을 것이다. 설거지를 마친 장그래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손의 물기를 닦아내더니, 석율에게 와서 손을 내민다. 얼른 가서 주무십시오. 뾰족한 목소리가 귀엽기만 해 석율은 결국 폭소하고 말았다. 웃음의 끝은 기침으로 마무리됐다. 눈물까지 맺히도록 웃고 기침한 석율도 그걸 가만히 보면서 입술만 비죽이던 그래도 얼굴이 붉었다. 그 손을 잡고 복층 침대로 올라갔다. 저는 소파에서 자겠다고 하며 내려가려는 그래를 또 뒤에서 휙 잡아당겼다. 아, 또 왜 이러십니까. 짜증 섞인 타박이 날아왔으나 굴할 석율이 아니었다. 그래의 체온은 늘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낮은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감기에 걸린 석율에게는 그것이 시원하게까지 느껴졌다. 품안에 가두듯 끌어안고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생각했던 대로 옅고 담백한 체향이 코끝에 묻었다.
"맨날 아프고 싶네. 장그래씨 오늘만 같으면."
"헛소리 작작 하시죠."
"헛소리 아냐."
조금 바르작거리는 것을 힘주어 눌렀다. 아, 정말, 장그래, 왜 이리 귀여울까. 왜 이리 예쁠까. 할 수만 있다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삼키고 싶었다. 슬쩍 내려다 보이는 귀는 붉었고,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심장 소리는 빨랐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신기할 만큼 기꺼웠다. 석율에게서 벗어나는 걸 체념한 듯 장그래는 얌전했다. 일인용 침대는 성인 남자 둘에게는 비좁았지만, 그 이상하게 꽉 찬 느낌이 오히려 더 좋았다. 이불 속은 두 사람분의 체온으로 더웠고, 석율은 그 열에 들떠 온 몸이 노곤하게 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거 알아? 장그래씨한테 되게 좋은 냄새 나. 나 오늘 되게 좋은 꿈 꿀 것 같다. 장그래씨 듣고있어? 응? 장그래. 푹 잠긴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살거리다가, 기어이 옆구리를 꼬집혔다. 장난스레 새빨간 귀 위로 입을 맞추자 장그래가 얼어붙는다. 아, 장그래, 정말, 어떡하지. 너를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
다시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꽤 몸이 가뿐했다. 품 안이 허전한 기분에 눈을 떠 보니 장그래는 없었다. 너무 아파서 장그래가 오는 꿈이라도 꿨나, 싶게 어제의 기억이 현실감이 없다. 장그래가 오긴 왔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그래가 와서, 죽도 끓여주고, 직접 먹여주고, 내가 끌어안는데 밀어내지도 않고 같이 잠도 자 주고, 생각하니 말도 안 된다 싶어 웃었다. 복층 계단을 내려서다가, 부엌의 인기척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어어, 그리고 걸음을 서두른다. 한번 발이 꼬였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부엌에는 어제 저녁 보았던 그 뒷모습이 있었다. 그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작지만 곧은 등. 아마도 죽이 들었을 냄비에서 보골보골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 행복감을,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석율은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등 뒤에서 확 끌어안고 배 위로 깍지를 꼈다. 놔주십시오,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목소리가 또 뾰족하다. 석율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작은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제 것이 분명한 샴푸 냄새가 풍겼고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고개를 툭 떨어트려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른다. 한석율씨. 말 끝이 조금 흔들렸다. 연신 키들거리다가,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숨을 귓가에 훅 속삭였다.
"지금 완전 섹시해, 장그래."
"장난 좀 그만……."
"내 색시할래?"
얼어붙는다. 이번엔 농담 아냐, 덧붙이자 작은 몸이 한 번 파드득 떨었다. 몸이 바싹 붙어있어, 그 흐트러진 호흡이며 날뛰는 심장소리며 전부 들렸다. 마치 작은 짐승처럼 그가 바르작댄다.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행복하게 해 줄게. 아직 감기에서 회복되지 않은데다, 잠이 덜 깨 목소리가 착 깔렸다. 버둥거리던 장그래가 다시 굳는다. 석율의 손이 느릿하게 그래의 배 언저리를 더듬는다. 아이같은 뱃살이 말캉하게 만져졌다. 그리고,
"아야야야야!"
석율은 장그래가 뒤로 미는 통에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넘어지며 손깍지가 풀린 틈을 타 장그래가 벌떡 일어났다. 석율은 엉덩이부터 척추로 달리는 짜르르한 통증에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환자를 이렇게 막 밀쳐도 되는 거야?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지만, 그런 것이 먹힐 장그래가 아니었다. 흰소리 자꾸 할 거면 가겠다는 장그래를 억지로 붙잡고 떼를 써서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또 한 번 먹여달라고 칭얼거려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장그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묵묵히 죽만 떠먹었다. 푹 숙인 목덜미와 귀가 새빨갛다. 감기가 나아가는 것인지 식욕이 동해, 그는 죽을 두 그릇을 비웠다. 햇살이 비쳐들어 등이 따끔거렸다. 매일 오늘 같았으면. 그 냄비에 죽 끓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가만히 턱을 괴고, 고개 숙인 그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엔 같이 깨어나면 좋겠다. 툭 내뱉은 말에 그래가 크게 기침을 했다. 눈물이 댕글댕글 맺혀서는 확 쏘아본다. 한 번만 깨물어 봤으면, 석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석율 씨, 정말. 비죽거리는 입술이 붉다. 아, 장그래, 그렇게 쳐다보면. 석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보다 몸이 빨리 움직였다. 그 입술은 말캉했고, 방금 먹은 소고기죽 맛이 났다.
빙그레님과 풀었던 썰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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