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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는 가방을 챙겼다. 또 이사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특별했다. 아버지가 보낸 짤막한 편지를 다시 꺼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 본 편지지에는 구김이 가득했고 약간 눅눅한 땀도 배어 있었다. 신도쿄시로 오거라. 반듯하게 인쇄된 편지의 내용은 그게 전부였고, 같이 첨부된 좀 더 긴 편지 쪽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성스러운 글씨(하지만 꽤 악필인)로 두 개의 주소가 휘갈기듯 적혀 있었다. 위의 건 네가 살 집 주소. 아래 주소지로 XX 일까지 와주겠니? 참, 동거인 남자아이가 있을 예정이니까 너무 놀라지 말아. 네 사촌이라는 것 같아! 약간 귀여운 척 하는 말투였다. 신지는 다시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목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뜨겁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 것이 결코 달가운 이유에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기대하는 자신이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카트를 잡아끌었다.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짐은 단출했다. 열기가 자글자글 올라오는 아스팔트길을 지나 전철에 올랐다.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한 번 닦아내고 손에 든 물병으로 바싹 마른 입가를 축였다. 분명 차가운 물을 샀건만 벌써 햇빛의 열기를 머금어 미적지근해져 있었다. 흔들리는 열차에 앉아, 카세트테이프를 귀에 꽂고 꾸벅꾸벅 졸았다.
“어서 와.”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그 소년이 서 있는 곳 주변은 기온이 낮은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신지는 눈을 깜박였다. 생판 처음 보는 소년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누구, 하는 말에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잠깐 스친다. 새빨간 눈동자, 은빛 머리카락, 종이처럼 창백한 피부. 부드러운 미소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이런 소년을 언제고 보았다면, 절대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감미로워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다시 더워진 것 같았다.
“난 나기사 카오루. 너는 이카리 신지, 맞지? 카츠라기에게 이야기 들었어.”
“아, 혹시 네가 나랑 같이 살게 될 거라는….”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민 손은 서늘했고, 전혀 땀을 흘린 흔적이 없이 보송해서 기분 좋았다. 그에게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에 머리칼이 자꾸 흔들렸다. 따라와. 그의 걸음은 가벼웠고 발소리는 경쾌해서, 마치 땅이 아닌 다른 것을 딛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이쪽지에 적힌 주소는 역에서 꽤 멀다면 먼 곳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금세 도착해 있었다. 집에는 묘할 정도로 생활감이 부족했다. 가구는 모두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품이었지만, 조금도 사용한 흔적이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는 손때조차 묻지 않아, 신지는 그도 사실은 여기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게 아닐까 멋대로 상상했다. 카오루는 볕이 잘 드는 널찍한 방으로 신지를 안내했다.
방은 간단한 가구가 놓여 있는 것 외에는 깨끗했다. 신지가 즐겨 사용하던 무난한 디자인의 앉은뱅이책상과 매트리스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여기서 지내면 돼. 그가 그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웃는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문이 닫기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신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쏟아진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출발할 때만 해도 남자아이와 살게 된 것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갑자기 확 실감이 났다. 그것도 저렇게 잘 생긴 남자애라니! 사촌이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처음 들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늘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곤 했으니까. 그녀는 양 볼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후, 진정해야지, 진정. 가슴을 쓸어내리던 차에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그녀는 또 부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씩 심호흡을 하고 과열된 얼굴을 가라앉히는 동안 문 밖의 소년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심장마비에 걸릴 듯한 그 눈동자가 다시 보였다. 그가 맑게 웃었다.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앗, 고, 고마워!”
그가 내민 유리잔에서 얼음 조각들이 짤그랑 소리를 냈다. 신지는 (한 번 미끄러뜨릴 뻔 하고) 그 컵을 받아들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 시렸다. 한심스럽게 버벅댄 것에 대한 어떤 조롱도 카오루에게선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린 듯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냉큼 받아든 유리잔의 얼음물을 들이마셨다.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쩡 하고 들이받는 차가운 느낌에 저절로 기침이 튀어나왔다. 뱃속이 시려서 몸을 떨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천천히 마셔야지. 다가온 카오루가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컵을 그가 다른 손으로 여유롭게 잡아 다시 건네주었다. 비명이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 손길에 되레 체할 것 같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의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카오루는 참을성 있게 등을 다독여 주었다. 신지는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이제 괜찮아, 말했고 카오루는 웃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신지는 얼얼한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아직도 차가운 컵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내려놓고 짐을 풀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방을 다 정리할 즈음 카오루가 튼 듯한 전축 소리가 작은 집을 채웠다.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할렐루야. 신지는 음악 소리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역시 별다른 무늬가 없는 소파가 놓여 있고, 텔레비전과 전축, 그리고 선풍기와 피아노가 있었다. 창 밖의 베란다에는 두 개의 묘목이 엉켜 자라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저런걸, 연리지라고 하던가. 카오루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넓은 창으로 비쳐 들어온 햇살 때문에 마치 그 광경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인 것 같았다. 작은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가 웃었다. 도와줄 건 없니? 작게 도리질을 쳤다.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물을 한 잔 더 떠다 주었다. 그 물을 받아 마시고 책을 읽는 카오루의 옆에 앉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며 피로가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다가 푹, 카오루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단정하게 눕혀져 있었고, 부엌에서는 계란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고마워.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로 중얼거리자 그가 빙긋 웃었다.
편지에 적힌 날짜는 바로 다음날이었다. 아침 대신 차려진 토스트와 계란을 먹다가 머뭇거리며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오루는 나랑 같이 가자, 내가 길을 알아, 말했다. 두 번째 주소지는 새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마치 일부러 그런 집을 고른 것처럼 한 번에 가는 전차가 있었다. 수 없이 많은 엘리베이터와 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마치 비밀 연구소나 기지 같았다. NERV. 문마다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에어컨을 가동하는 건물 내부는 딱 지내기 좋을 만큼 선선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거대한 기지 같은 그 건물을 신지는 놀라움에 찬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카오루는 그녀를 어떤 널찍한 방으로 안내했는데,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곳이 꽤 높은 사람을 위해 준비된 공간임을 알았다.
“안녕. 네가 이카리 신지니? 신지라고 부르면 될까?”
“네? 아, 네.”
책상 앞에 서 있던 여성이 돌아보더니,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의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을 간신히 넘긴 것 같았지만 어딘지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었지만 소매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윗 단추 몇 개는 푸르고 있었고, 계급장도 삐뚤어져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이 여자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에 동봉된 사진에서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실물보다는, 음, 조금 더 예쁘게 보이는 사진이었다.
“난 미사토야. 카츠라기 미사토. 그냥 미사토라고 불러.”
“아, 네. 잘 부탁해요, 미사토 씨.”
“카오루랑은 처음 보는 건가? 너랑 사촌이라던데.”
“사촌?”
여성은 제대로 대답 틈도 주지않고 수다스레 재잘거렸다. 반문한 것은 카오루 쪽이었다. 그의 시원스런 눈썹 한 쪽이 살짝 들려올라갔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 그는 곧 그렇게 말하며 기다랗고 모양 좋은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미사토는 잠깐 의아한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을 뿐 되묻지 않았다. 신지가 그에 대해 물을 말을 찾느라 잠시 어물거리는 틈에 미사토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다른 이야기 들은 건 있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역시나.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더니,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신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어, 침을 꼴깍 삼키고 무어라도 말하려고 하던 찰나 미사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쯧, 그녀는 가볍게 혀를 차고서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이 곧 오실거야. 조금 기다려봐.”
사령관님, 이라는 말에 파드득 몸이 굳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지칭함을 알고 있었다. 긴장한 것을 감추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카오루가 옆에서 손을 잡았다. 미소짓는 붉은 눈동자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상하게 갑자기 긴장이 확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이상한 소년이었다. 미사토는 몇 가지 시시콜콜한 화제에 대해 더 말을 걸었고 신지는 조금 멍한 정신으로 그 물음들에 대답해 주었다. 초면에 나눌 만한 뻔한 화제들 몇 가지를 찔러보던 미사토가 입을 다물자 방은 조용해졌다. 신지는 카오루에게 잡힌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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