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오루X신지] 컴플렉스에 가까운 사랑
- TEXT/EVANGELION
- 2014. 6. 12. 20:05
- Posted by 유렌
#1.
너의 첼로 소리가 좋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그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는 걸. 천연스레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사실은 수업이 끝난 이후 줄곧 연습 중이었으니 결코 방금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한쪽 팔에 얼얼한 통증이 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리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연습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울렁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의 대답에 그는 조금쯤 안도한 표정이 되어 내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바로 시작할까?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뱃속에서 수백 마리의 뱀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활을 집었다. 몸이 안 좋아? 귀신같이 나의 상태를 알아채곤 하는 그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젓자 갸웃거리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가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이쪽을 바라본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첼로의 현을 당겼다. 그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어깨에 바이올린을 얹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 같은 것은 흉내도 내지 못할,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에 속이 울렁거렸다.
첼로 연주 연습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남 앞에서 틀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처음 연주해 보는 곡들은 아무래도 실수가 많았고, 느낌을 살려 연주하기도 어려웠다. 새로운 곡을 연습할 때면, 혼자서 늦게까지 연습실에 남거나 방에 틀어박혀 첼로를 연주하며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가곤 했다. 한 곡 한 곡을 익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남들 하는 곱절은 연습해야 맘에 드는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저 네 완벽주의가 지나친 것뿐이라고 토우지는 말했지만, 혹시 실수라도 해서 남에게 폐가 되는 것만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무대에서 쉽게 떠는 성격인 만큼 나는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혼자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 남아 첼로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속 같은 부분에서 실수를 하던 제법 어려운 곡이었다. 몇 번이나 같은 부분을 틀리다가, 다섯 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 없이 만족스럽게 연주해 냈다. 뿌듯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불현듯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소리가 나, 너의 첼로."
당황해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습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인기척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이어서 들린 온화한 목소리는, 하필이면 이런 보잘것없는 연주를 들키기엔 가장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를 교실이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사실 그는 출석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교실에서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선 나기사 카오루가 예의 미소 띤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내가 똑같은 부분에서 어처구니없이 틀리는 걸 다 듣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귓가가 확 달아올랐다. 그가 가벼운 몸짓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무의식중에 몸이 굳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몰래 들어왔다가 깜박 낮잠을 자 버렸는데, 덕분에 좋은 음악을 들었어. 너는, 그러니까... 이카리 신지 군이었지?"
내 이름 같은 건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기에 조금은 의외였다. 그가 청하는 악수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 내밀자, 그가 빙긋이 웃었다. 동성임에도 가슴이 철렁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미소였다.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몰라 고개를 조금 숙여 비스듬하게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단을 세우고 교복 바지를 넣어 신은 그의 스니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안녕. 나기사 군."
"나를 아는구나."
"물론이지. 나기사 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 있어. 갑작스럽겠지만, 너와 듀엣을 해보고 싶어."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나기사 카오루-는 '특별'하다. 그를 만나 본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인상적인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의 특별함을 이루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정말로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안정된 기분이 들게 하는 그의 분위기와, 그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실은 듯 아름다운 그의 바이올린 소리였다.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는 이미 온갖 콩쿨을 휩쓸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벌써 굴지의 음대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그야말로 '천재'였다. 반면에 나는, 별로 눈에 띌 일이 없는 그저 그런 남학생이었다. 특이점이라면 드물게 첼로를 켤 줄 알고, 그래서 관현악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별로 좋아서 첼로를 시작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부모님 대신 나를 맡아 기르던 '선생님' 이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만두지 않고 계속한 것은 첼로가 싫지 않았던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도 그만두라고 말한 적이 없어서였다. 관현악부에 든 것도 첼리스트가 필요하다는 관현악부 지도교사 미사토 선생님의 부탁 때문이었다. 역시 누구도 그만두란 말을 하지 않아 부활을 지속했다. 바이올린 역의 아스카에게 이야기했더니, 바보 신지다운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인상을 썼다.
원래대로라면 그와 나의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어야 했다. 그는 뛰어난 솔리스트였지만 합주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고 나는 튀는 것이 싫어서 대규모 합주가 아니면 잘 참여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에게는 콩쿨 경험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혼자 있어도 튀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연주자였고, 나는 그냥 합주에서 남의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인, 음계를 틀리지 않고 배운 대로 연주할 줄 아는 그저 그런 첼리스트였다. 솔직히 지금도 그가 무엇 때문에 나에게 듀엣을 제안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또 거절하면 될 것을, 그걸 받아들인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하잘것 없는 실력은 오히려 그에게는 방해가 될 것이고, 나는 그의 곁에서 나의 하찮음만을 되새기게 될 뿐인데. 그와 합주 연습을 계속할수록 나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내색하지 않고 참을 수 있었지만 곧 한계가 오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손이 어긋났다. 찢어지는 듯한 불협화음이 귀를 긁었다. 또 틀리던 부분이었다. 미안.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함께 연습을 시작한 이후 계속 이런 패턴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단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반면 나는 같은 곳에서 같은 실수를 끝없이 반복했다. 한두 번 괜찮다 싶으면 다음 번에는 또 고친 줄 알았던 다른 실수를 저질렀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와의 단 한번의 듀엣 이래로 나는 한 번도 실수 없이 합주를 마친 적이 없었다. 나의 실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공연까지의 날짜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카오루는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달래주었지만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무대에서 창피당할지 모른다는, 그리고 그의 연주를 내가 망치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잠깐만 쉬고 다시 해 보자."
그가 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물이라도 조금 마시는 게 좋겠어.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식은 내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내 손을 쥐어주고 있던 그가 마실 것을 가지러 다녀온다며 나가고 난 후, 나는 혼자 남아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울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연습은 엉망이었다. 오늘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그가 3일 정도만 쉬자고 말했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대로 첼로는 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지킬 자신은 없지만 알았다고 대답했다. 마음을 비우고 다른 일에 집중해 보라고도 말했다. 그 편이 부담감을 더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역시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미안해. 바닥을 보며 걷다가 불쑥 말했다. 앞서 가던 그의 걸음이 멈칫했다. 어째서 사는 집마저 같은 방향인 것일까. 묵직한 책가방이 어깨를 짓눌렀다. 가로등이 지운 긴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서 뻗어져 나와 나의 그림자 위로 겹쳐 있었다. 그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오른손을 꺼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붉은 빛의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이건 애초에 내 제안이었으니까. 나는 오히려 네가 거절하지 않아서 고마운 걸."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기대고 싶은 다정함이 흠뻑 묻어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느낌에, 좀 더 세게 이를 악물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이런 기분이 되었다. 왜 이렇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일까.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래도……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아. 너의 실력은 이미 충분해, 신지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진심이어서 오히려 나를 비참하게 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나의 왼쪽 손목 부근을 잡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잠시 나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조금 풀린 나의 손가락들을 가볍게 쓰다듬은 후 다시 손을 떼었을 뿐이었다. 이대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말해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애써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뒤를 따라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득히 멀었다.
카오루는 듀엣 연주자를 찾던 참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항상 하고 싶던 첼로와 바이올린의 듀엣곡이 있는데 그 첼로 역으로 자신이 적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었고, 원래대로라면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그에 대한 동경과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허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가끔 그의 음반을 사서 듣거나 하기도 했다. 내 또래지만 이미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는 그에게 나는 일종의 동경심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무대에 서는 기회라는 유혹을 떨치기는 몹시 힘들었다. 그가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꽤나 들떠버렸고, 제안을 수락했을 때 그의 기뻐하는 얼굴은 마치 나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와 듀엣 연습을 했던 이튿날은 모든 게 완벽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연주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의 첼로에서도 평소와는 다른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단 한번도 자신의 연주에서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합주가 끝났을 때, 나는 흥분으로 숨이 가빠져 있었다.
"너와의 소리, 정말 기분 좋았어. 둘이란 건 좋은 거구나."
그가 활짝 웃어보였다.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미소는 여느 때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그의 얼굴도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나도 격앙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연습은 순조로웠다.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으로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2.
그가 불씨를 당겼다.
하지만 기름도 도화선도 분명 나의 안에 있던 것이었다.
그 자신감이 산산조각 난 것은 공연이 한달쯤 남은 어느 날 저녁, 그가 혼자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은 날부터였다. 그 날은 같이 연습할 계획이 없는 날이었다. 카오루는 종종 별 이유 없이 수업을 빠지곤 했는데, 그 날도 하루종일 수업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조금 먼 곳에서 작게 울려오는 음악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이끌리듯 인적이 드문 공터로 들어섰다. 거기에서 그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듣는 그의 솔로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그의 어떤 연주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콩쿨에서도 저만큼 연주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의 즉흥곡인 것 같은 음악에는 설레는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듣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것 같은 음악소리였다. 심장이 아프게 뛰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문득,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도저히 이 사람처럼은 연주할 수 없어.
이 사람에게 나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
그 이후부터 급속도로 연주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강렬히 남은 그의 연주의 이미지에는, 나는 어떤 식으로도 맞출 수가 없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감을 잃어갔다. 그 동안 점점 공연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카오루의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 아름다웠고 그에 비해 나의 실력과 재능은 초라하기만 했다. 그와 나의 사이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한때는 그에게 가까워졌다고 믿었던 것이 바보 같을 정도로 깊고 넓은 간극이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들떠 있던 마음은 더욱 깊숙히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나는 공연을 포기한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카오루는 그만두라는 말을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그만둔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타인의 권유 없이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만류해 주지 않으면 멈추지도 못하는 한심하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었다.
주말이 지나고, 공연 날짜는 이제 이 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실수로 그가 공연에서 망신당하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잠이 들면 겨우 몇 시간만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깨어났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주말 내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첼로만 켰다. 무리하게 연주해 댄 탓에 손가락에 오래 전에 잡힌 굳은살 위로 다시 물집이 올랐다. 음식도 평소의 절반 정도밖에는 먹지 못했다. 아스카까지도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했을 정도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신지 군. 당분간 연습을 쉬자."
"하지만 이제 정말 시간이…."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야."
내 얼굴을 본 그가 굳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이제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내 연주는 스스로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주말이 지나기 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주말에는 푹 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나는 조금도 쉬지 못했다. 사실은 연주는커녕 멀쩡하게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나는 비참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거슬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나는 소리처럼 웅웅 울렸다. 그가 내 양 어깨를 붙잡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야. 너의 마음은 이미 안정을 잃어버렸어.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연습해도 악화되기만 할 뿐이야."
알고있다. 그런 것 쯤은 알고 있다. 숨이 막혀왔다.
"미안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애써 참았다. 그는 말없이 나의 등을 다독였다. 차라리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나보다 더 뛰어난 연주자와 함께 아무 걱정 없이 듀엣 공연을 했을 것이다. 왜 나 같은 사람한테 그런 부탁을 해서.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어. 나는 네가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아직도 그렇게 말해 주는구나."
심장 부근이 쓰렸다.
-이카리 말이야.
뜻밖에 들린 자신의 이름에, 문을 열려던 손이 멈춰버렸다.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 관현악부의 부원 중 한 명의 것이었다. 이름이 분명, 타케다였던가.
-나기사도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그 녀석이라면 훨씬 더 좋은 파트너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데.
쉿. 이카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 녀석 요즘 나기사랑 합주 연습 때문에 부실도 거의 안 오잖아? 상관 없을 걸. 그리고 솔직히 내가 전에 지나가다가 합주하는 걸 들었는데, 나기사는 실수 한 번 안하는데 이카리는 정말 엉망이더라. 무슨 실수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손이 떨렸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본 곳에 아스카가 서 있었다.
“바보신지. 넌 화 낼 줄몰라?”
“…사실인 걸.”
나는, 힘없이 내뱉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다시 교실로 향하려고 했다. 별로 저들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걸로 서먹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내 옆을 지나쳐 걷더니 부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부실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 두 명이 놀란 얼굴을 하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소리 높여 내 뒷담화를 하고 있던 타케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듣자듣자하니까 한심해서 못 들어 주겠네. 그래서 그렇게 잘난 너희들은 그 왕재수 나르시스트한테 듀엣 하잔 소리라도 들어 봤어? 그렇게 질투가 나면 담배 피면서 뒷담화 할 시간에 연습을 한 번 더 하라구! 이카리는 늘 너희의 두배는 연습하고 공연에 올라간다는 건 알고 있는 거야?”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타케다와, 그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사과했다.
“괜찮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런 한심한 실력으로 듀엣이라니. ”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습게도,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머리가 차분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타케다와 그의 친구가 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스카는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쩔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맞는 말을 한 사람에게 사과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주제넘은 탓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도저히 더 연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그에게 폐를 덜 끼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못 하겠어. 미안해."
그렇게 말하자 카오루는 정말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역시 나 같은 건 무리였나 봐. 좀 더 일찍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지만 너는 더 훌륭한 사람하고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거야."
책임감 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와 같은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함께 연주할 수 없다. 그것은 부담감과는 다른 문제였다. 나는 도저히 그와 합주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고 나의 첼로는 그의 바이올린과 불협화음을 만들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나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신지군. 몇 번이나 말하지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아니야! 이제 그만해, 카오루군. 나는 할 수 없어. 봐, 나는……. 나는 이렇게…."
나는 이렇게 한심해.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끓어오른 감정이 목을 졸랐다. 그것이 나를 죽여 갔다.
"……부담감이 아니야…."
목소리가 떨렸다. 참았던 눈물이 방울지며 쏟아졌다. 부담감이 아니었다. 나를 짖누르고 있는 감정의 이름은 보다 추악하고 보다 근원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을,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 밖에 나는 가지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질투하고 있었다. 그의 음악에는 나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숭고하고 고귀한 것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질투했다. 그리고 그렇게 질투하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그래서 그 감정을 감추고 다른 것들을 그 위로 덮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씩 나의 내면에 차오르다가 마침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쳤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가 당겨버린 작은 불씨를 계기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맹렬하게 타올라 마침내 나의 내면을 새카만 재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마치,
"……네가 미워."
열렬한 사랑과도 같았다.
가면늑대 님 리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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