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에 해당되는 글 5

  1. 2015.01.18 [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4 - 샘플 7
  2. 2015.01.06 [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3 - 샘플 7
  3. 2014.12.28 [석율그래] 썰 백업
  4. 2014.12.28 [석율그래] 기억의서랍 02 - 샘플 3
  5. 2014.12.15 [석율그래] 기억의 서랍 01 - 샘플 3

[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4 -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1편 http://rainote.tistory.com/34

2편 http://rainote.tistory.com/37

3편 http://rainote.tistory.com/49


*센티넬버스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장그래가 센티넬(이능력이 있고 정신이 불안정)이고, 한석율이 가이드(센티넬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라는 것 정도만 알고 보시면 크게 무리 없이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GM-Nell <섬>



>








「맛있게 드십시오.」

무뚝뚝한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석율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세 번은 문자를 보내야 답이 오는 것이, 말이 없기는 현실에서나 전화기 너머에서나 다를 바가 없었다.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모티콘을 전송하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카페를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아침 먹으란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꽤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편이었고 어린 시절 그는 매일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벼 가며 거친 밥에 된장국을 말아 꼭꼭 씹어 넘겨야 했다. 장그래도 비슷한 사람이려니 넘겨짚은 것이 정곡이었던 모양이었다. 몇 통 없는 답장만으로도 그는 쉬이 상대방의 표정을 떠올려 냈다. 놀라서 둥그레졌을 눈을 상상하니 또 웃음이 났다.

"밥 드시면서 실실 웃으시는 거, 되게 모자라 보입니다, 한석율씨."
"어, 백기씨 아냐. 오랜만이네. 프로젝트 끝났나 봐요?"
"……내가 말했었나요?"
"아뇨, 당연 내 전매특허 독심술이지."

내, 참, 못 말려. 윙크와 함께 건넨 멘트에, 장백기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늘 먹던 걸로? 이것만 다 먹고 준비해 드릴게. 백기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석율은 잽싸게 남은 음식을 해치우고는, 땡땡이 무늬 셔츠의 카라 깃을 한번 정돈하고, 목을 좌우로 꺾어 돌린 후에 기지개를 켰다. 휘핑크림을 추가로 얹은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만드는 동안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간 한석율씨 같은 사람이 카페 같은 걸 할 생각을 한 게 신기해요, 심심하지 않아요? 장백기는 안경 너머의 순한 눈을 접어 웃었다. 아, 사실 그래서 인테리어를 좀 신 나는 걸로 할까 하다가, 누나들한테 완전 까여가지고. 그리고 카페 하면 사람 많이 만나서 의외로 괜찮아요. 그는 실실 웃으며 대답하고는 카운터로 돌아가 휴대폰을 집었다. 메시지 창은 여전히 그래가 보낸 맛있게 드십시오, 와 자신의 이모티콘이 마지막이었다. 잠깐 허공에 떠 있던 손가락들이 금방 바삐 움직였다.

「뭐 해요? 가게 바쁜가?」
「바쁘면 답장 안 해도 돼요.」
「안 바쁩니다.」

또박또박, 어차피 폰트도 다 정해진 휴대폰에서 그래의 메시지라고 해서 더 선명하고 덜 선명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 답변이 유독 반듯하게 보이는 것은 잘 닦아 갈무리한 것 같은 그 목소리와 태도 때문일 것이라고 석율은 생각했다. 장그래는 특이했다. 한석율이 아는 한 가장 독특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꽤 넓은 인맥의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였음에도 장그래는 특별했다. 그는 깊이 모를 호수 같아서, 돌멩이 하나쯤 던져넣어도 표 하나 나지 않을 것 같다가도 어떤 때에는 스치는 낙엽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손을 담그면 청량한 온도가 손목을 시원하게 스칠 것만 같았다. 장그래, 이름도 그래여서는, 입 안에 넣고 굴릴 때마다그 어감이 박하사탕처럼 목청을 싸아하게 식혔다. 그것이 뻔뻔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석율로서도 사뭇 근지러웠다.

「안 바쁘면 지금 놀러올래요?」
「죄송합니다.」
「농담.」

간질거리는 손가락 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장그래의 미간을 짚었던 손가락이었다. 그 곳의 온도만이 한 톤 낮은 색이었다. 서늘함이 고인 이마를 찌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들여다보기 어렵던 그 말간 얼굴. 메시지 창의 숫자가 사라진 채로, 수 분 간 응답은 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고선 붉어졌을 목덜미를 생각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리자 와르르 쏟아졌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책을 읽던 백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아, 미안해요. 톡 좀 하느라고. 사과를 건네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아, 의자 주문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내가 바빠서 못 챙겨드리거든.」
「평일 낮 아무때나 대환영!」
「혹시 장그래씬 평일 낮에 바쁜가?」
「아닙니다.」

"웬일로 문자를 그렇게 오래 해?"

아, 나쁜 일 하다 들킨 아이 모양으로 후다닥 주머니 안으로 휴대폰을 숨겼다. 동네 서점 주인인 오상식 사장이었다. 만성 불면증을 겪는 사내는 늘 머리가 까치집이었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요즘 같이 학습지 아니면 책이라곤 팔리지도 않는 시대에 고전 전집이니 철학서 같은 것에 서점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어 그의 가게 매상보다도 아내가 놀이방을 열어 버는 수입이 많다고 했다. 암만 그래도 말야, 세상이 팍팍해도, 어, 사람이 말야 똘스또이니 칸트, 이런 거는 읽고 살아야지. 그는 서점 운영 이야기만 나오면 늘 철 지난 고집을 피워댔다. 상식은 그래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흘깃 쳐다보았다. 인기척도 모르고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던 것이 쑥쓰러워 또 체열이 귓가로 쏠렸다. 그, 전에 왔던 손님이, 문자를 보내서, 요. 더듬더듬 대답하다가 그것이 제가 듣기에도 변명하는 말 같아 마른 숨을 집어삼켰다. 누가 뭐래? 오 사장은 입술을 내밀고 뚱한 얼굴로 쿠키를 집어 씹었다. 마누라 바가지 피해서 온 거야, 임마. 그는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카운터 위로 책을 툭 집어던졌다. 그래가 일전 예약했던 소설책이었다. 귀찮게 말야, 요새 이런 건 인터넷 서점이 더 싼 거 모르냐? 투덜거리는 것과 다르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오사장님 매상 올려드려야죠. 빙글빙글 웃으며 화답하곤 책을 받아 챙겼다.

"별, 시답잖은……. 요즘도 별 일 없냐?"
"예, 뭐 그렇지요."
"영감 같은 건 여전하군……. 그 컵은 뭐야, 못 보던 건데. 니 취향 아니잖아."
"아, 선물 받았습니다. 손님한테."

상식은 미간을 찡그렸다. 별 일이 없다더니 완전 별일이잖아. 장그래는 뭘 답삭답삭 받거나, 누구랑 문자질을 하거나, 그런 놈이 아니었다. 전화도 잘 받지 않아서 뭐든 연락을 하려면 직접 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됐다. 능력 때문에 사람 하나 사귀는 데 남들보다 곱절은 고생하는 녀석이다. 특히 남의 물건에 닿는 일을 병적으로 꺼렸다. 수 일씩 잠을 못 자고 악몽울 꾼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선, 선물 씩이나 받았지. 그것도 컵만 봐도 한 법석 하는 놈일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 말이지. 살아있는 철벽 같은 장그래한테 선물을 안겨준 것을 보면 절대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머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그래도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시선을 거두었다. 다 큰 남의 집 아들놈이 누굴 만나 뭘 하고 다니든 뭔 상관인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떼같은 세 아들자식 앞날이나 걱정하라는 마누라 바가지가 귀에 얼얼했다. 그럼 가 본다. 손을 내젓는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십시오, 깍듯이 인사했다. 짤랑거리는 종소리를 남기고 오 사장은 골동품점을 나섰다. 그래는 차를 새로 끓여냈다. 음악을 틀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켰다가, 도착해 있는 메시지 알람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럼 이번 주 수요일 11시 콜?」
「3초 안에 답 없으면 수락 한 걸로 알겠습니다~」
「3!」
「2!」
「1!」
「땡! 그럼 11시에 차 가지고 마중 갈 테니 그 때 봐요 :D」
"……."

잠깐 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와르르 도착한 메시지들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답장을, 뭐라고 해야 좋은 거지. 아니, 내가 답장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건 맞나? 메시지가 도착한지는 20분이나 지나 있어 더 애매했다. 한참을 화면도 못 넘긴 채로 아직도 조금 얼얼한 이마를 긁었다. 문득 기껏 새로 내려온 차가 식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과 어디까지 친해져도 좋은 거지. 아니, 나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정의되지 않은 관계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어지러이 떠다녔다. 머릿속이 마치 물건들이 모두 어질러진 서랍장 같았다. 미지근한 차에서는 떫은 맛이 났다. 한숨을 내쉬고 물을 새로 끓였다. 목이 타서 자꾸 마른침을 삼켰다. 거리 조절. 늘 그것이 어려웠다. 그에겐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가깝거나 반대로 너무 멀리 있었다. 그의 서투름은 호의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이렇게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밀쳐내거나 물러서고 만다. 지금 석율과의 거리감이, 그 손가락과 제 이마의 온도차가, 그에겐 몹시 애매했다. 애매한 거리를 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썼다가 지우고, 나중에, 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확신도 없이 덥석 달려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상대방의 상처받은 목소리는 언제나 그래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고민하고 있죠?」
……귀신인가.
「생각해 보고 천천히 답변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전날까진 답 줘요~ 답 없으면 또 끌고 나와 버릴라니까는.」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묵직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거의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짧은 시간 동안의 외출에도 쉽게 지쳐 버렸다. 석율과의 문자 대화 역시, 그로서는 조금 피곤했다. 말 자체도 많은 편이 아니었거니와 얼굴을 보지 않는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오늘은 미리 가게를 닫아야겠다, 눈 사이를 손끝으로 꾹꾹 문지르며 생각했다. 관자놀이마저 간질거렸다. 음악을 틀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서 있다가, 의자 위로 주저앉아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

석율은 여태 답장이 없는 대화창을 다시 확인하고는 조금 굳은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햇살의 꼬리가 길게 늘어져 가게 안에 드리워져 있었다. 여유를 가장한 답변을 보내놓고는 틈만 나면 시선이 휴대폰 액정을 향하고 있었다. 본디 무심한 성격인 사람을 자신 쪽이 자꾸 괴롭히고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괜히 답답하고 서운했다. 이전보다 누그러진 것 같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래에게서는 벽이 느껴졌다. 그 벽이 답답해서, 자꾸만 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고 싶어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는 되찾은 이후 부적처럼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는 목걸이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어째서 저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인지, 물건을 왜 팔지도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한 것들이 산더미였다. 호기심만이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는 사람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거의 10분마다 답장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 잔째인 줄도 모르는 커피를 마저 들이킨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머리가 띵했다. 목청까지 전부 말라 버린 감각이 불쾌했다. 날숨에는 마른 기침이 섞여 있었다.

"나 알아요. 그거 싸이코매트리 아니에요?"

그 말을 던진 사람은 가게의 단골손님 중 하나인 안영이였다. 그녀는 다음날 카페 오픈 시간에 작업물을 잔뜩 들고 나타났는데, 중요한 마감이 몇 개나 겹쳤다며, 머리를 긴 대강 묶고 잘 쓰지 않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유명 패션 잡지의 기자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가끔 기자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모델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뻤고 패션 감각도 좋았다. 왜 아깝게시리 얼굴을 그렇게 써요. 마감 때마다 후줄근한 몰골로 나타나는 그녀에게 석율은 늘 한마디 했으나 영이는 그 때마다 웃어 넘길 뿐이었다. 잠깐 쉬고 있는 영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가게의 골동품으로 넘어갔다. 골동품점 주인의 특이함에 대해 이야기 해 주자,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기자로서의 본능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싸이코매트리? 반문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운을 떼었다.

"싸이코매트리. 초능력의 일종인데, 물건으로부터 기억을 읽는 거예요. 드물게 사물 뿐 아니라 사람과 접촉해서 기억을 읽는 사람도 있고, 기억 뿐 아니라 감정이나 여러 가지 다른 걸 읽기도 하는 모양이에요. 소위 말하는 '능력자'에 해당하죠. 영어로는 센티넬이라고도 하는데 들어본 적 있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뭐, 정부 보호나 '안내자'-가이드라고도 하는데- 없이 사는 걸 보면 그렇게 강한 능력은 아닐 거예요. 나도 몇 명 취재 때문에 만나 본 적은 있는데, 싸이코매트리는 직접 본 적 없어요. 좀 궁금하긴 하네. 만나 본 사람들 말로는 좀 예민하대요. 아무래도 접촉에 민감하다던데."
"아아…."

석율은 이마를 긁적였다. 나 마음대로 만졌었는데. 어쩐지 싫어하더라니, 사람이 낯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문제였나? 그렇다면 상당히 실례되는 짓을 한 셈이었다. 입술을 짓씹다가 혀로 쓱 핥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그를 힐끔 쳐다본 영이는, 문제가 있었다면 말을 했겠죠, 사물이 아닌 사람과 접촉해서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싸이코매트리는 정말 소수니까 걱정 마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야아, 영이씨야말로 싸이코매트리 아냐? …생각을 읽는 건 텔레패스라고 하는데, 훨씬 소수예요. 실실 웃으며 건넨 말은 농짓거리도 되지 못했다. 하여간, 빈 틈이 없어요. 쩝 입맛을 다시곤 턱 언저리를 매만졌다. 영이의 관심은 이미 다시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그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전화기는 며칠간 계속 잠잠했다. 괜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 답장이 도착한 것은 날짜가 수요일로 넘어간 이후였다. 나 참, 내가 문자 제 시간에 안 봤으면 어쩌려고 이런 시각에. 석율은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렸다. 며칠간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화요일 밤까지 대답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뭐, 그래도 답장이 온 게 어디냐 싶었다. 이 시간까지 고민하고 있었을 그 작은 뒤통수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습니다, 대답하던 때의 말투가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 데라고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만나온 사람 중 가장 묘한 사람이었다. 그럼 약속대로, 내일,아니지, 오늘 아침에 보시죠. 알겠습니다, 돌아온 답장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그답다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자꾸 오시게 만들어서……."
"내가 제안한 건데요 뭘."
"답장도, 좀 더 일찍 드려야 했는데."
"아, 그건 좀 서운했어요."
"……."

석율은 옷깃을 정돈하며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셔츠가 요란스러웠다. 그래는 그가 잡아 이끄는 대로 차에 올랐다. 가감 없는 석율의 답변에 고개를 드니 석율이 씩 웃고 있었다. 석율은 그래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이 조금 귀엽다 생각했다. 저렇게 빨가면, 좀 따끈하려나? 생각한 순간 손이 알아서 움직여 귓바퀴 위쪽을 쥐고 있었다. 온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원래도 선이 둥근 눈이 댕그랗게 커져 그를 바라본다. 아. 그제서야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이 맺혀 있었다. 작은 콧망울도 도톰하고 뭉글뭉글한 입술도 모두 너무 가까웠다. 목 뒤로 확 열이 올랐다. 아, 미안해요. 후다닥 몸을 돌려 시동을 걸었다. 곁눈질로 쳐다보니, 장그래는 석율이 잡았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괜히 제 귓바퀴가 얼얼한 것 같은 감각에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손가락 끝이 시려서,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허공에 손을 비볐다. 마음이 간지럽다. 너무 간지러워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나갈 것 같았다.
그 날은 낭만카페 사상 석율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한 날이었다. 그는 머그컵을 깨뜨렸고, 손님들의 오더를 뒤바꿔 서빙하는가 하면 아메리카노에는 시럽을, 아포카토에는 시나몬을 뿌려 내놓기까지 했다. 그의 얼빠진 모습을 볼 일이 없던 단골손님 몇몇이 카운터를 흘끔거렸고 참다 못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를 장그래의 옆자리로 쫓아버렸다. 그의 모든 얼빠진 짓들을 지켜본 장그래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무표정이었다. 아, 나 원래 안 이런데. 그래씨 알잖아요, 저번에 왔을 땐 괜찮았잖아. 석율은 구차한 말을 늘어놓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압니다. 그래의 대답은 늘 간단했다. 석율은 테이블에 머리를 파묻은 채 한참 말이 없다가, 담배 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가 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머그잔 속 커피에선 아직 따뜻한 김이 올랐다. 속 좀 차리라고 아르바이트생이 타 준 것이었다. 무심코 그 머그컵께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내가 마음대로, 먼저 읽어도 되나? 지금까지야 의식한 바가 없었다. 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문제들이었다. 잠시 손이 허공에서 맴도는 사이, 갑자기 닥쳐든 석율이 잔을 휙 치웠다. 알싸한 담배 냄새가 그에게서 풍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커피 부족해요?"
"그게…."
"수현 씨, 여기 아메리카노 한 잔 리필해줘요."
"네? 네."

석율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옆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방금, 컵 뺏은 거 아닌가? 시선을 모로 돌린 석율은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래는 눈을 깜박였다. 문자에 답장하기까지 고민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원하는 거리감도, 석율이 원하는 거리감도, 무엇 하나 잘 알 수 없었다. 속마음을 알아보기 힘든 남자. 분명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가 어디까지 허락할 지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해서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이 줄 수 있을 만큼만 받아야 한다 생각하니 하염없는 막막함이 덮쳐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위인인가? 생각이 미치자 발 밑이 아찔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받자, 여기까지만 받자, 자꾸만 그렇게 받다가, 받아서 삼키다가, 문득 그가 더 이상 오지 말라며 선을 그으면, 휘청이다 넘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화요일 밤까지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벽을 넘긴 시각에 눈을 질끈 감고 보낸 문자에는 거짓말처럼 금방 답장이 왔었다. 마치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마치? 흐트러지려는 생각을 바로잡으려 다시 눈을 깜박였다. 석율은 여전히 그래 쪽을 쳐다보지 못한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깍지 낀 손가락으로 제 손을 두드리는 동작에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그는 거의 십여 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미안해서 어쩌죠. 식사 대접하기로 해놓고."
"잘 먹었는데 무슨 이야기에요."
"내가 해 줘야 의미가 있는 거지."
"다음에 해 주시면 되죠."
"…또 올 거예요?"

눈을 크게 뜬 얼굴이 돌아본다. 대뜸 말해놓고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와 줄 거예요? 다시 던지는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풀어지는 미소에 안심한다. 우스운 감정들이다. 망설이던 손이 가만히, 또 손등 위에 겹쳐진다. 아직도 적막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귀를 울리는 심장 소리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맥박은 석율이 잡았던 귓바퀴 위에서도 뛰고 있었다. 그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자니 석율도 제 눈치를 보는 듯 슬쩍 손을 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마른 침을 삼키고,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제는 익숙한 패턴이다, 생각했다. 모두가 서투른 제 탓이었다.

"미, 미안해요."
"예?"
"아, 닿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

겨우 말해놓고, 석율은 또 그래의 눈치를 보았다. 햇빛을 거의 쐬지 않아 말갛고 투명한 얼굴 위의 표정을 읽는 것이 아직도 버거웠다. 별것 아닌 말이 왜 이리 하기 어려운지, 얼굴이 타버릴 것 같았다. 뭘 이렇게 긴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는 가만히 석율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아아, 작게 중얼거렸다. 착 내리깐 시선 위로 남자 치곤 길고 섬세한 속눈썹이 흔들린다. 아닙니다. 그래는 눈을 몇 번 더 깜박였다. 속눈썹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검은 눈동자가 맑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석율을 똑바로 응시하며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작고 창백한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 석율의 손끝에 닿았다. 누구 것인지도 모를 체온 때문에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



트위터에서 많이도 징징댔던..4편입니다.

원래는 후기를 안 적는데 이래저래 쓸 말들이 생겨서 적어보네요.

제 징징 받아 주신 분들께 일단 감사를...연재가 익숙지 않은 관종의 징징댐...이라 생각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대충 분량으로는 1/3~1/4 지점을 통과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비축분 만드려던 시도는 장렬히 실패했네요...이전에 올리던 분량에서 자르면 너무 애매해지는 것 같아서...

전에 한 번 공지한 적이 있지만 서랍은 6편까지만 웹공개이고 뒷부분은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저 존잘 제목 캘리그래피는 티백( @TB_BT13 ) 님이 제공해 줬습니다. 티백님 사랑해 ㅠ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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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기억의 서랍 03 -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센티넬버스 설정 일부 차용한 AU. 싸이코매트리 장그래와 가이드 한석율이 나옵니다.

BGM  교체했습니다.


벌써 3편이나 왔네요.

편당 분량이 적어서 조금 늘린다고 늘렸는데 올리려고 보니 여전히 적어서 좀 서러운...

줄 간격 태그가 아무리 해도 씹혀서 접기태그를 포기했습니다 또르르르




정지신호에 차가 멈춘 사이, 석율은 힐끗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장그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 담배를 태우며 카페에 가잔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다시 가게에 들어섰을 때, 그래는 진열장 사이를  돌아보고 있었다. 문을 등지고 선 자그마한 등이 신기루처럼 흐릿했다. 그 뒷모습을 마주한 순간 갑작스럽고 이상한 불안감이 석율의 뒷목에 확 끼얹혔다.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는, 그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작은 짐승 같은 까만 눈이 동그래진 채 석율을 돌아보았다. 현실보다는 꿈 속에 세워져 있는 듯한 골동품점. 장그래는 그 비현실적인 공간의 중심축 같았다. 그러니까 혹시 이 남자는 가게 밖으로 나가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손목을 잡아 끌어 잰걸읆으로 가게 밖으로 나섰다. 뭐라고 할 만도 했지만 그래의 잔잔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다만 다급하게 꼬이는 발소리만이 등 뒤에 따라붙었다. 가게 밖에 나서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가빠져 버린 숨을 몰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장그래는 녹지도 재가 되지도 안개처럼 흩어지지도 않고 그저 태양빛을 받아 새하얄 뿐이었다. 그제서야 맥이 탁 풀리며 휴,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장그래씨. 오늘 가게 안 바쁘면, 내 카페 보여줄 테니 지금 나랑 안 갈래요? 그렇게 이상한 안도감에 사로힌 채로, 뱉을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말로 카페에 와 달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뒤의 어색함이란. 그는 이마를 짚었다. 말재주 하나는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있어 그렇게 긴 침묵이란 오히려 말을 많이 해서 해서 목이 타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 뒤로 어찌어찌 무마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만 생각하면 입 안의 침이 전부 마르는 느낌이었다. 좋습니다. 상쾌하기까지 했던 그래의 대답은 석율이 겨우 상황을 무마했다고 생각한 순간 돌아왔다. 그래는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거절당한 것으로 여기고 다음 계획을 짜고 있었던 석율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뭐라고 따질 말도 찾지 못하고 서 있는 사이 장그래는 가게를 정리하겠다며 들어갔고, 석율은 가게 밖에서 혼자 서서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장그래가 가게를 닫고 나오기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곁눈질로 조수석에 파묻히듯 앉은 장그래를 쳐다보았다. 꽤 더운 날씨일 텐데도 구태여 후드를 쓰고 있었다. 에어컨 틀까요? 건넨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율이 입을 다문 동안에는 장그래도 거의 말이 없었다. 라디오를 틀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클래식 음악이 든 CD를 재생시켰다. 그래가 힐끗 고개를 들어 석율을 쳐다보았다. 모차르트네요. 왜요, 이런 거 듣는 거 의외에요? 아뇨. 저도 좋아해서. 그럼 가게에 모차르트 틀어봐요. 나름 어울리는데? …괜찮네요. 석율은 바이올린 선율을 콧소리로 흥얼흥얼 따라 불렀고 그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필요 이상의 말은 잘 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석율의 카페는 번화가에 있어서 외진 곳에 위치한 그래의 가게에서는 차로만 20분이 걸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그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장그래씨? 일어나요. 다 왔어요."
"……아, 미안합니다. 깜빡 잠들어서."
"괜찮아요."

석율이 씩 웃어보였다. 쉽사리 뺨이 붉어지는 얼굴이다. 그 수줍은 표정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예쁘네요. 문득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래가 말했다. 잠시 후에야 그것이 석율의 카페를 보고 한 말임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모던한 분위기로 무장한 석율의 카페는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석율의 복장과는 꽤 상반된 이미지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뻐요. 홀린 사람처럼 가게 입구의 목제 테라스와 가벼운 도트무늬 장식이 들어간 간판을 돌아본 그래가 말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되려 제가 머쓱해져서, 석율은 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자자, 안은 더 멋있으니까. 이제 들어가시죠, 손님. 특별석으로 모시겠습니다."

과장된 동작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여성을 에스코트하듯 상냥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석율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카페는 제법 널찍했고, 내부 인테리어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연스러운 베이지 톤의 벽과 바닥, 그리고 목제 가구들이 정갈하게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벽에는 기본적으로 무늬가 없었지만 간간히 현대미술풍의 그림들이 걸려 있어 지루한 느낌은 없었다. 천장으로부터 뻗어내려온 조명갓에 박힌 도트 무늬가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위로 깔린 발랄한 음악이 주인의 정서를 보여 주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얼마 되지 않는 손님들만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그들은 카페로 들어서는 석율과 그래를 힐끗 쳐다보았을 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게를 맡겨 두었던 아르바이트생만이 쪼르르 달려와 인사했다. 석율은 그래를 카운터 앞에 붙은 자리로 안내했다. 커피를 타면서도 계속 대화를 나누려는 속셈이었다. 의자를 좀 더, 편한 걸로 바꿔야겠다. 오래 앉기엔 불편한 구조의 카운터 앞 의자를 보며 생각했다.

"어떤 커피 좋아해요? 뭐든 말만 하시라. 아, 밀크티도 됩니다. 아니아니, 아까 커피는 마셨으니 주스가 좋으려나?"
"석율 씨가 자신있는 거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자신 있는 거요? 여깄는 메뉴 다 자신있지, 나야."

뻔뻔하기까지 한 대답에, 푸핫, 그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교살이 많은 순한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도톰한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허공을 움직이던 석율의 손이 어색하게 멈췄다. 새하얀 얼굴 위로 부서지는 인공 조명이 눈부셔 잠깐 이마를 찡그렸다. 아, 미안해요. 비웃은 거 아니에요. 한석율 씨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요. 멀거니 눈만 꿈벅이는 석율을 눈치챈 그래가 맨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잠시 벙 찐 얼굴을 하고 있던 석율은 금세 원래 페이스로 돌아왔다. 커피 부담스러우면 오늘은 레모네이드 마셔요. 그리고 다음에 와서 꼭! 갓 내린 커피도 맛보시고. 부산스레 레몬과 과즙 짜는 도구를 꺼내며, 그가 말했다. 손가락이 쓱, 그래를 가리켰다가 다시 부산스레 움직인다. 좋아요. 그래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는 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는 가만히 턱을 괸 채 가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얌전한 시선을 내리깐 채로 테이블이며 찻잔들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새하얗다. 유독 그 골동품점에 있으면 한낮의 거리를 걷다 꿈 속에 잘못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가게 밖에 나와 있어도 장그래에게는 곧 사라질 것 같은 비현실성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잡아당겨 그의 실존을 확인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것을 꾹 참았다. 사라질 리가 없는데. 움작거리던 손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생 레몬을 짜서 만든 레모네이드를 건네자, 받아들고 마신 그래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왜, 별로예요?"
"아뇨, 셔서. 근데 맛있어요."
"맛있단 말로는 부족하죠. 아주 톡톡 쏘는 게 섹시하지 않습니까?"

섹시, 라는 말에 그래는 다시 표정을 찡그리다가, 아 셔서 그럽니다. 하고 툭 내뱉었다. 긴 듯 아닌 듯 성질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석율은 별로 개의치 않고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야기거리가 마르지 않는 사람이라,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그래의 눈에는 제법 신기했다. 그는 카페 사장 답게 그래의 가게에서 이런저런 도자기들을 제법 사 갔는데, 그것들은 카운터 뒤의 찬장 위에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카페에서 튈 법도 하건만 과연 석율의 말대로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안목, 안목 하더니 본인이야 말로 안목이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석율이 서비스 운운하며 직접 구운 커피와 과일주스를 추가로 내 주었고, 그래는 그것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거봐,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겠어요? 손사래를 치는 그래를 향해 석율이 피식 웃어 보였다. 나중에 또 와서 팔아달라고 미리 빚 달아 두는 겁니다. 단골 만드는 데는 아주 이거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짓는 미소가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상냥한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래는 카페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석율은 그래에게 기어코 도장이 찍힌 카페 마일리지 카드까지 쥐어주었다.

"오늘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그만 가볼게요."
"아, 내가 안 데려다 줘도 되겠어요?"
"…괜찮습니다. 아마."
"아마는 뭡니까."
"……."
"검색해 봤는데, 카페 바로 앞에서 지하철 타시고 XX역에서 내리시면 되겠더라구요. 뭐하면 오늘은 다시 데려다 드릴까? 내가 억지로 데려온 거니까 끝까지 책임은 져야죠."
"아닙니다. 오늘 너무 폐를 끼쳐서."
"폐는 무슨. 나야말로 고마웠어요. 아, 그러면 장그래씨, 나한테 문자 한 통만 보내줘요."
"예?"
"번호 저장하게요. 뭐하면 지금 찍어줘도 좋고."

미소띤 얼굴로 내미는 휴대폰을 눈만 깜박거리며 쳐다보았다. 얼른. 어색한 손놀림으로 번호를 찍어서 건넸다. 명함까지 줬는데, 내 번호 저장 안 했구나. 뭐 그렇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래의 귀가 달아오른 것을 보고, 석율은 다시 피식 웃더니 얼른 메세지 하나를 전송했다. 「낭만카페 한석율입니다. 이번엔 저장하십쇼^-^」 그래의 휴대폰이 깜박거리며 울렸다.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 우기는 것은 것은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마감까지 아르바이트생에게 떠넘기고는 일방적으로 쫓아온 탓이었다. 들어가서 문자해요. 전화면 더 좋고. 개찰구 너머에 선 석율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작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래의 손에는 구태여 석율이 쥐어준 수제 쿠키가 한 봉지 가득 들어 있었다.


*


지하철은 항상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 조금은 견딜 만 했다. 머릿속에 달려 들어오는 소리들을 흘려들으려 애쓰며 구석진 자리에 구겨지듯 앉았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 지하철을 지나친 잡상인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거렸다.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눈을 꽉 감았다. 오랜만의 외출 탓에 몹시 피곤했다. 석율이 손가락 끝으로 짚었던 이마가 이상하게 근질거리는 기분에 자꾸 제 손으로 그 곳을 문질거렸다. 억지로 눈을 감으려 노력하는데, 문득 휴대폰 알람이 울었다. 한석율이었다. 집에 가서 문자하라느니 마치 연락을 기다릴 사람 처럼 굴더니,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기가 무섭게 귀신같이 문자가 날아든다. 자기가 들어가면 문자하겠다는 말이었나.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앉았어요? 하긴 이 시간이면 서서 가진 않겠다, 그쵸.」
「모차르트 좋아한다면서요? 들으면서 가요.」

짤막한 메시지와 함께 동영상 링크가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서툴게 자판을 찍어 보내자 웃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정신을 집중했다. 사방을 채운 산만한 소음도 집중할 거리가 생기니 조금 견딜 만 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가게에 음악을 트는 게 좋을 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집에 도착해서는 씻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오랜만의 깊은 단잠이었다. 잠깐 꾸었던 꿈에는 한석율이 나왔다. 그는 여러 친척들에게 정성껏 편지를 쓰고 있었다. 소파 앞 탁자에는 잘 포장된 머그컵들이 쌓여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어났어요? 아침은 드셨구?」
「네.」
「와, 성실하시네. 난 방금 일어났어요. 아침은 뭐 먹어요? 나는 아침에 밥을 영 못 먹어서, 우유 한 잔 마시고 이따 브런치 할 것 같은데.」
「아, 장그래씨 브런치 먹어봤어요? 느끼한 거 잘 못 먹나? 담에 오시면 함 해드릴까.」
「여기 점심때 브런치 먹으러 오는 사람도 은근 많아요.」

아침으로 된장국을 끓여 먹고 샤워를 마치고 나와 잠시 매장 점검을 하는 사이 석율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가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석율은 메시지 여러 통을 한꺼번에 두두두 보내버렸다. 그것이 평소 이야기 할때 쉴 새없이 말을 늘어놓는 석율의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전화기 너머의 한석율도 면대면일 때의 한석율만큼이나 수다스러운 모양이었다.

「먹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다음에 한 번 만들어 드려야겠네. 이거 뿅 반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요리하는 남자, 크.」
「아닙니다. 사먹을게요.」
「또 정 없이 구신다. 드셔 보시고 맛있으시면 또 드시러 오시면 되지. 소문도 좀 내주고.」
「어젠 석율씨가 만드시는 건 다 맛있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뭐 취향이란 게 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 강요하진 않아요. 그래씨처럼 아침에 꼭 된장국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잖아.」

석율의 답장을 보고, 그래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얼른 손가락으로 대화 로그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지만 아침밥으로 뭘 먹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메시지는 전혀 없었다. 때려 맞춘 건가? 아연해서 액정만 쳐다보고 있자니 금방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좀 놀랐죠? 때려 맞춘 게 아니고, 사실 내가 독심술 좀 해요. 하하하하.」
「실없는 소리 좀 그만 하시죠.」
「쌀쌀맞긴~ 그런 거 아닙니다. 아, 저 이제 가게 오픈해야 해서.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그 메시지를 끝으로 대화는 끊어졌다. 독심술은, 개뿔. 애먼 사람 머릿속을 강제로 들락거리는 것 만큼 정신력이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는 손끝으로 콧잔등을 꾹꾹 눌렀다. 아직도 눈썹 사이만 온도가 높아서 간질거렸다. 이마를 짚고선 능청스레 웃던 얼굴을 떠올리다가 눈을 꾹 감았다. 가게 문을 열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닦다 보면 오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유독 먼지 쌓인 선반을 닦고 허리를 펴니 1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점심을 먹기는 애매하고, 차나 끓여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엌으로 향했다. 포트에 물을 데우며 컵을 고르다 석율이 주고 간 머그 앞에서 손이 멎었다. 그래의 다른 식기들과는 명확히 다른 발랄한 색상의 컵을, 잠깐 고민하다가 집어들었다. 지잉, 휴대폰이 깜박였다. 큰 접시 위에 오믈렛과 소시지, 샐러드가 먹음직스럼게 담긴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완전 끝내주죠? 식욕이 막 끓어오르죠? 일주일 내 방문하신 장그래씨에겐 특!별!히! 무료시식의 기회가!」그리곤 웃는 이모티콘. 하여간, 낯 뜨거운 사람이었다. 손가락이 하릴없이 자판 위를 헤매다가 맛있게 드십시오, 하고 딱딱한 답변만을 보냈다. 머그에서 티백을 꺼내어 버리고, 휴대폰을 가지고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석율이 어제 건넸던 쿠키를 꺼내어 씹었다. 적당히 바삭바삭하고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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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 썰 백업

짧은 썰들 백업.


#1.

아 노밑끝 억울한일은 장그래가 당하고 한석율이 서러워서 펑펑우는거 보고싶다 뭐 누명쓰고 알바잘렸다거나 하는 것도 좋고 음 아니면 고딩au로 장그래가 뭐 급식비 훔친 누명 썼거나 그랬다가 아닌걸로 밝혀지는데 그래도 계속 안좋은 소문 돌고 그러니까석율이가 폭발해서 야 니네가 누명 씌운 거잖아! 니네 맘대로 의심해놓고 의심 풀렸는데도 지랄하는거아냐! 하면서 화내고 장그래는 놀라서 눈 댕그래지고.. 장그래 손목 붙잡고 질질 끌어서 사람 없는데까지 온다음에 막 얼굴 빨개진채로야 너 등신이야? 호구야? 바보야? 왜 가만 있어? 쟤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대는데 왜 당하고만 있는 건데? 소리지르다가 주저앉아 울었으면... 그래가 오해는 내가 샀는데 왜 니가 울어.. 하다가 에휴 하면서 석율이 등 토닥여주면 좋겠다


#2.

석율이네 집에서 자고 가는 날에 하필 또 그 바둑꿈 꾸면서 가위 눌렸으면 좋겠다 석율이 그래 잠꼬대에 깼는데 애가 땀 삐질삐질 흘리고 그러니까 잠이 싹 달아나서 막 깨웠으면 울면서 가지마 하는데 얘는 그래 과거 모르니까 괜히 만감 교차하면 좋겠다
일단 막 깨우는데 잠 덜 깬 그래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힘으로 석율이 팔목 잡았으면... 장그래 괜찮아? 하면서 다독이는데 계속 정신 못 차리고 가지마요, 가지마, 하고 울어서 괜찮아 나 어디 안가 하면서 달래줬으면... 그래 몸 얼음장같고 덜덜 떨리면 좋겠다 얘한테 바둑기사 못 된 건 평생 상처로 남을 것 같아서... 원인터 들어오고 많이 나아졌지만 괜히 계약직인 거 떠오르고 여기도 내 인프라아 아니구나 하는 생각 들면서 예전 상처까지 후벼파진 기분일것같음
석율이는 제대로 오해하고 장그래씨 이렇게 울리고 전애인 진짜 나쁜 사람이네, 이제 그만 잊어. 하면서 달래줄 것 같다 그래가 애인 아닙니다, 하면 뭐 그럼 더 나쁜 사람이잖아 하고 펄쩍 뛰겠지 ㅋㅋㅋㅋㅋ 결국 피곤하고 귀찮아서 오해하게 내버려 둘듯
사실 상대가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보면 오랜 짝사랑을 차인 건 맞으니까... 하여간 그때까지 그래가 석율이 품에 쏙 안겨 있다가 놀라서 떨어지면 한석율 그제서야 킬킬대면서 왜 이 오빠 넓은 가슴에 좀 더 기대서 울어~ 하면서 놀리면 좋겠당


#3.

이거 쭉 생각해봤는데 처음엔 석율이가 몸집이 더 작았으면 좋겠다 어릴 땐 아무래도 한두 살 차이도 크니까... 그래서 형 형 하고 뽈뽈거리며 쫓아다녔는데 그래네 집 풍파맞고 하느라 그래는 중학교 때 후로는 거의 안 자란 거였으면 앞뒤없지만 어느순간 훌쩍 커서 그래보다 눈높이 높아진 석율이가 씩 웃는 게 보고싶다


#4.

장그래 불면증 걸려서 눈밑 퀭한거 보고싶다 엄청 바쁜 프로젝트 내내 야근 엄청 하다가 수면패턴 꼬여서 밤에도 못자는데 어쩌다 잠들면 계속 바둑 꿈 꾸고 가위 눌리고 이게 프로젝트 끝난 후에도 계속돼서 완전 얼굴 파리지는거 보고싶다 그래 눈 풀린거보고 왜그래 장그래 하면서 석율이가 챙겨주는거 보고싶다 요즘 계속 제대로 못 잤다고 하니까 점심시간에 휴게실 끌고가서 무릎베개 강제로 시키고 눈 딱 가려버리면 좋겠다 뭡니까 하는데 아 한숨 자요. 못 잤다면서. 이런다고 잠이 오겠습니까? 침대에서도 못 자는데. 투덜대면서 눈 붙였는데 신기하게 잠들면 좋겠다. 진짜 꿈도 안 꾸고 푹 잠. 평소 그렇게 시끄럽던 한석율도 꼼짝 안하고 그래 자게 냅둠.  한시간정도 잤는데 진짜 너무 꿀잠자서 본인도 얼떨떨해하면 좋겠다 그리곤 그래도 좀 상쾌해져서 일하는데 한석율이 또 나타나서 커피랑 샌드위치 주고 사라짐. 점심 굶었잖아요?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자기 바쁘다고 휙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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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센티넬버스 설정 일부 차용한 AU. 싸이코매트리 장그래와 가이드 한석율이 나옵니다.


퇴고 하기 너무 쟈증나서..그냥 올립니다..흡...저는..슬애기...

이 글은 어느 넬빠수니의 넬헌정연재물......ㅎ..농담이에여 그런ㄱ건 아니구 그냥 어쩌다보니 지금 넬에 꽂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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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그래] 기억의 서랍 01 - 샘플


++3/29 미생 쁘띠 온리전에서 발행된 회지의 샘플 글입니다.

뒷이야기는 해당 책에서만 보실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8ㅅ8


율래덕질: 뜻밖의 연재... 결국 미생이 나에게..무슨 짓을...

성장통 버린 건 아닌데 일단 떠오르는 것부터 해볼게요(무책임)

다음편이 언제 나올진 저도 모릅니다 저는 원래 연중 대마왕이기 때문에...(무책임2)

센티넬버스 기반의 가이드 한석율x싸이코매트리 장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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